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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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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일

태중/청대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1679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태중(台仲)이고 호는 청대(淸臺)이며 배우지 않아도 글을 할 수 있다는 근암(현재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에서 1679년 심(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찰하여 뜻을 학문에 두고 고인의 독서와 수신(修身)하는데 전심하여 영민함이 향리에 이름 높더니, 1710년(숙종 36년)에 문과에 급제하며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여러번 관직을 옮겨 1727년(영조 3년)에 만경현령(萬頃縣令)이 되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며 유학(儒學)을 진흥시켰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모의한다는 소문을 듣고 관찰사에게 비밀히 보고하는 한편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병기(兵器)등을 정비하고 이에 대비하였으므로, 반란 중에도 경내가 평안하고 또한 전란 평정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을 때 시폐를 바로잡고 수령의 선택에 공정을 기하며, 과거의 폐단을 덜며 교육의 쇄신과 향상과 당화의 문제 등을 임금께 열거하여 이 모든 것이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상소 하였으며, 뒤에 울산(蔚山)부사를 거쳐, 고향에 돌아와 농천대의 산수를 사랑하여 청대(淸臺)라고 호를 짓고 그 곁에 서옥(書屋)을 지어 자연 경관을 즐기며 여러 제자와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그 뒤 제명이 있어도 잘 나가지 않고 혹 나가는 일이 있어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이 80세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그 이듬해인 1760년 81세로 세상을 떠나니 영조께서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내리며 사람을 보내어 장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후에 근암서원(近岩書院)에 추향하였다. 그의 학문은 특히 이퇴계(李退溪)를 사숙(私淑)하였으며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두 가지로 분리하고 이(理)는 본연의 성(性)이 되고 기(氣)는 기질(氣質)의 성이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는 평소 글을 읽는데도 외우는 것에 힘쓰지 않고 실제로 읽고 그 내용에서 얻는 것을 중요시 하였으며 문장에도 이승(理勝)을 힘썼으며 시(詩)는 충담(沖澹)을 주로 하여 염락을 본받고 과거제도는 심술을 해롭힌다 하여 고향에서 서당에 모여도 경서만 강론하고 정문은 하지 않았다.

또 1756년(영조 32년)에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으로 실록 편찬시 공이 크다하여 영조께서 친히 어필 16자를 하사하여 유림에서 근암에 어서각을 건립하여 유풍을 추앙하여 오던 중 일본인에 의해 훼철 당하여 1971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초학지남(初學之南), 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소대비고(昭代備考), 가범(家範), 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시문(詩文), 잡저(雜著), 일기(日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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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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