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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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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억제(洪億濟)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진충보국(盡忠報國)한 홍억제(洪億濟) 공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적장에 뛰어든 용장(勇將)이 있다. 공은 선조 때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자(字)는 여상(汝象)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장사랑(壯仕郞) 응경(應鯨)의 아들로 명종년간에 효령현(孝令縣) 불로동(不老洞)에서 태어났다. 그 선조는 대대로 소보면(召保面) 부황리(夫皇里)에 우거(愚居)한 서천공(西川公) 순(淳)이 공의 6대조이고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인 건원(乾元)이 증조이며 통덕랑(通德郞) 치수(治水)가 조(祖)이다.

부친을 따라 부황리에서 효령현 불로동으로 이거(移居)하였다 한다. 공은 어릴 때부터 담력이 크고 지략(智略)이 뛰어 났으며 체구가 대절웅건(大節雄建)하고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고을에서 모두 대인(大人)다운 큰 인물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차차 성장함에 따라 말달리기이며 활쏘기를 연마하였으며 병서(兵書)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공의 재질과 용맹(勇猛)을 보고 향리에서 모두 이르기를 나라의 위급함에 쓰일 큰 인재(人材)라고 하여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4월14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1진은 부산 동래,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이끄는 2진은 부산을 상륙하여 언양(彦陽) 경주(慶州) 영천(永川)을 지나 신령(新寧)으로 침공하여 왔다. 이렇게 해서 적의 1진에 기장(機長) 양산(梁山), 2진에 의하여 언양 경주 울산 천지(天地)가 적군의 숲 속에 들어갔다. 이때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運命)을 구하고저 분연히 적중에 뛰어든 의기에 찬 한 장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억제(洪億濟)공이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려는 굳은 결심아래 영천 김응택(金應澤) 경주 김응복(金應福)과 더불어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진 장사 7백 여명을 규합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위 의흥 신령 영천 경주 이견대(移見台) 언양 울산 학성(鶴城) 장대(莊臺)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1592년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에 제수(除授) 되어 2년간 걸쳐 영천 경주 울산을 드나들며 수십 차례 적을 수없이 무찔렀다. 이러한 공의 전과는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 때 국난을 구하려는 의병들의 무리가 모여들기 3천 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597년(선조 30년 丁酉) 1월 14일에 적은 다시 우리의 강토를 짓밟아 쳐들어 왔다. 천리 가운데 남쪽 왜노가 맨 먼저와 닿는 동래(東萊) 기장(機長) 김해(金海) 울산(蔚山) 경주(慶州) 등지의 어질고 충성스런 향민(鄕民)들로 하여금 원수를 잊지 않고 죽기를 기약하고 복수코저하니 군신(君臣)의 고절(高節)이며 향당(鄕堂)의 반열(班列)에 끼인 자들은 충의(忠義)로써 호국(護國)한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경주 울산 경계에 자원(自願)해 모인 의열(義烈) 38인은 하늘에 고해 맹세하여 "우리 동국(東國)의 의형(義兄)들은 사절(死節)을 함께 한다." 원컨데 "진실로 숭앙(崇仰)해야 할 것은 그 공을 다투지 아니함이며 다만 원컨데 절개를 세워 복수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정유재란에 왜적 14만 명의 우군(右軍) 선봉장 가또오(加藤淸正)는 군대를 인솔하여 영천 경주를 거쳐 10월 3일 서생포(西生浦) 울산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가또오는 이사노 (淺野長慶)등에게 울산 도산(島山)에 성(城)을 쌓게 하였다. 이 울산의 완공을 앞둔 12월 23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공격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동정군(東征軍)은 명(明)의 경리(經理) 양호(楊鎬)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12월 26일 우리 한 병력은 목책 안에 기어 들어가 토장 사이로부터 적성(敵城) 밑으로 접근하였으나 적의 탄환이 비오듯 퍼부어 우리 사상자가 많아 부득이 철수하고 말았다. 홍공은 조명연합군으로 조선 측의 별장 김응서(金應瑞)의 병력 5천5백 여명, 명(明)의 구원보병 3만9천, 마병(馬兵)8천이며 적군의 울산성 수장(首將) 가또오(加藤淸正)의 군사 1만 명 서생포 구로다(黑田長政) 병력5천과 대치하였으나 1598년 도요도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적군은 사기가 떨어지자 아군은 더욱 힘을 얻어 공격을 하자 가등청정은 울산성새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이로써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 7년의 왜란을 통해 서생포성은 거이 왜적이 잔류하던 곳이요 정유재란은 도산성 싸움의 격전지가 되었다. 홍공은 1598년 도산성 전투에서 적과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장렬하게 순국하고 말았다.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30여 차례 적과 싸워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고 공훈을 세워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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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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