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홍여하

백원,일청/목제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부계
출생시기
1621년(광해군 13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부계(缶溪)로 1621년(광해군 13년)에 대사간 호(鎬)의 아들로 밤실(현재 문경군 영순면 율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백원(百源) 또는 일청(一淸)이라 하며 호는 목제(木齊) 또는 산택제(山澤齊)로 조선조 숙종때 문관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뜻과 행실이 단정하였는데 독서를 즐겨하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애는 반드시 후일에 큰 선비가 되리라]하더니, 그의 학문은 4서(四書)를 근본으로 하고 6경(六經)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의 저서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특히 주자학(朱子學)에 연구를 많이하여 식견이 고상함과 학문의 바른 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숭상하는 사람 중의 한 분 이었다.

1654년(효종 5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 해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檢閱)에 전적(典籍)을 역임하고 이어 대교(待敎)·봉교(奉敎)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에 이르러 효종에게 충언(忠言)의 소를 올려 왕은 옳게 여겨 기껍게 여겼으나 그 일을 맡아보는 사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효종 9년) 다시 관직에 나가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는데 소사 중에 완남 부원군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黃澗)에 귀양 갔다가 이듬해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와 서제를 신축하여 현판을 산택제(山澤齊)라 붙이고 15년동안 경전을 벗하여 학문을 드높였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하여 선왕(효종)의 뜻을 받들어 복제 문제로 송시열 등을 추방하고 홍여하는 다시 기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司諫)에 특명되었으나 1678년(숙종 4년) 숙환으로 죽었으며 1689년에 부제학(副提學)을 추증하고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향사하였다. 저서로는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儀禮考證), 여사휘찬(麗史彙纂), 동사제강(東史提綱), 문집(文集) 약간 권이 있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