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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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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림

여용/경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25년(중종 20년)
시대

상세설명

청빈(淸貧)한 도학(道學)선비 홍림(洪霖)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공의 자(字)는 여용(汝庸)이요 호는 경암(警岩)이다. 1525년(중종 20년)에 소보면 부황리(扶皇里)에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인 의숙(義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조는 옥당의 제학(提學) 호(號)가 서천(西川)인 홍순(洪淳)이며 조(祖)는 부호군(副護軍)인 자건(自乾)의 후손이다. 공은 어린 시절부터 천질(天質)이 학문을 좋아하고 절제(節制)와 실행이 엄정근신(嚴正勤愼)하여 본성이 지행(知行)을 돈독(敦篤)히 하며 경서(經書)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연구하고 매사 처리가 치밀(緻密)하였다.

학행으로 천거(薦居)되어 선교랑(宣校郞)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남원부사(行南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이퇴계선생(李退溪先生)의 문하(門下)에서 배워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사표일세연원(師表一世淵源)이 되었다. 부황리 봉황정사(鳳凰精舍)에서 강론(講論)하니 향중(鄕中)의 홍유석학(鴻儒碩學)이 구름 모이듯 운집하였다. 선생의 미질(美質)은 퇴도(退陶)를 열어 성취되었고 향중의 유림(儒林)이 모두 적라(赤羅)의 군자(君子)라 일컬었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至極)히 효성(孝誠)스럽더니 선고(先考) 상(喪)을 당하여 묘소(墓所)에 여막(廬幕)을 짖고 기(朞) 1년 동안 죽과 소금만 들고 장(醬)을 먹지 않으니 수척하여 겨우 연명하였다고 한다. 만년(晩年)에 봉황정사(鳳凰精舍)에 소요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문하생(門下生)들과 계몽(啓蒙)과 심경(心經)을 주로 강론(講論)하였다. 선생의 초옥(草屋) 주위에는 기암절벽(奇巖絶壁)의 경승(景勝)이 좋아서 조용히 생활하면서 매란(梅蘭)의 향훈(香薰)에 젖는 듯 자연을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은 퇴계(退溪)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진리(眞理)가 일상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신념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고 근본이 되는 것은 성(誠)이며 그에 대한 노력으로 경(敬)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그의 학문과 인생의 최후 결정(潔淨)은 경(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장자 낭장(郎將) 경침(景沈) 차남 만호(萬戶) 경창(景昌) 삼남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경호(景浩) 삼 형제를 불러놓고 고인(故人)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알고 실천(實踐)하고 행실과 몸가짐을 법도(法度)로 방정(方正)하게 예법(禮法)으로 가지도록 전하고 졸(卒) 하니 향년 53세였다. 우리는 고매(高邁)한 인격과 학덕을 겸비한 도학(道學)과 사상을 계승하여 승화(昇華)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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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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