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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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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구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1878년(고종15)에 봉화군 봉화면 문단리에서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의 9대 방손(傍孫)으로 출생했다. 집이 너무 어려워 여러 곳을 전거하다가 경기도 저평 상석리에서 살면서 하사(下沙) 안승우(安承禹)의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사람됨이 총명수려하고 정식하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나이 19세가 되던 해인 1897년에 우리 나라 각지에서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항의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는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6년의 일본과의 불리한 통상조약 등을 반대한 것으로 경기도와 충청도가 더욱 격렬하였다.

홍사구는 스승 안승우와 함께 충주, 원주, 제천의 의거(義擧)에 참전하였다. 처음에 스승 안승우가 재천에서 의거할 때 종사(從事)하였으나 충주의 싸움에는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으나 재거(再擧)를 할 때 홍사구는 제천에서 주야로 의거를 주선하였다. 제천 남성(南城)의 싸움에서 스승인 안승우가 탄환을 맞고 땅에 쓰러지자, 일군(一軍)이 모두 흩어져 버렸으나 홍사구는 홀로 스승을 호위했다. 안승우가 홍사구에게 물러가 후계(後計)를 도모하라고 죽으면서 권하였으나 "스승이 죽음을 당하는 마당에 문생이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리요"하며 끝내 물러가지 않고 적과 대적하다가 침략자인 일본군의 칼에 두 팔을 잘렸고 다시 총살되고 말았다.

다음날 숙부되는 홍성칠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 사체를 수습하여 제천에서 장사지냈는데 제천 도사(都事) 이도철(李道轍)이 의림지 옆의 그의 선산에 묘를 쓰게 하였고 제천 사림(士林)에서 발문(發文)하여 충북 일대로부터 양간(襄杆)에 이르기까지 1,700兩의 돈을 거두어 부인 성씨(成氏)와 노모를 위해 집을 사주고 생활토록 했고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고 손질하며 시제(時祭)까지 올리고 있었다.

공은 이 때 혼인은 했으나 후사(後嗣)도 없이 젊은 청춘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흔쾌히 바치셨고 날로 헝클어져 가는 한말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몸바친 애국심을 길이 귀감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광복 후 1963년에 나라에서는 그 의열을 높이 인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그 유족에게 주고 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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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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