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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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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

사경/죽산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57년
시대

상세설명

허석(許碩)의 관은 하양이며 조선시대의 명상(名相)인 허조(許稠)의 후손이다. 대대로 이어진 충의의 후예로서 군위군 의흥면 가곡(家谷: 현 고로면 화수동(現 古老面 華水洞))에서 1857년에 태어났다. 자는 사경(士景) 호는 죽산(竹山)이라 불렀다. 공의 가세는 지극히 어려웠으나 농사에 전심전력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은 지극하였다. 성품이 온순하며 모든 일을 뜻에 맞게 행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특히 일인들의 우리 나라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날로 더 해져 가니 좌시(座視)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1918년 8월 의흥면으로 통하는 도로 요소 요소의 암벽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붙여서 대중의 항일사상을 일깨웠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효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하며 충은 곧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터에 하물며 다른 나라의 임금을 어찌 섬기랴.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너희들이나 우리가 다를 바 없다. 너희들은 어찌 원수의 사람들이 아닌가! 원수를 보복하려는 심정이 날로날로 커 가니 너희들을 일시에 전멸하고자 하노라!"

그해 12월 18일 고종이 승하하시자 더욱 분개하며 침식을 전폐하면서 독립을 희구(希求)하였다. 기미년(1919) 2월에 고종황제를 위하여 사당을 지어서 제사를 드릴 뜻을 품고 화수동 집 뒤에 터를 잡고 땅을 고르는데 이 사실을 안 일본순사가 그를 잡으러 왔다. 이 때에 허석은 "백성이 임금과 어버이를 알지 못함은 개와 말과 같도다. 너희들에게 끌려가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자결을 하겠노라"하고 버티며 죽으려 하니 자손들이 울면서 만류하여 드디어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일본인 주재소장이 그에게 큰 소리로 협박 공갈을 하며 총검으로 후리치니 그는 의연하게 꾸짖으며 지팡이로 사생결단 대항하였다.

그는 다시 군위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그는 서장에게 항변(抗辯)하기를 멈추지 아니 하였다. "나라 잃은 백성이 자기 나라를 찾고자 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왜국간신(倭國奸臣)들로 인하여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였으므로 그 어른을 애도(哀悼)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며 또 너희들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며 지팡이로 책상을 때려 부시어 대항을 하니 서장은 후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1919년 5월 대구 지방법원 의성 지청에서 징역 1년을 언도 받아 대구 형무소에서 갖은 고문과 수모(受侮)를 받는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노령에 영양실조 마저 곁들어서 생명이 경각(頃刻)에 달려 병사(病死)직전에 출감하여 그리던 가족 품에 안겼으나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귀가 3일 만인 1920년 4월 24일 그의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한 체 6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1982년 8월15일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유공표창을 추서받고 그 다음해인 1983년 4월 22일 허석의사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에 한솔 이효상(李孝祥)의 비문과 석대 송석희(宋錫熙)의 글씨로 『허석의사순국기념비』(許碩義士殉國記念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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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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