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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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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후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허후는 문경공 허조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급제, 직제학을 지내고 143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문경공의 훈도에 따라 충효에 힘쓴 바 부친상에 애도를 극히하고 노모에게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한성 부윤, 예조 참판을 거쳐 1444년(세종 26)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그해 대흉작으로 백성이 아사하는 사태에 이르러도 수령들이 구제할 길이 없으니, 허후가 상주하여 국가에서 저장하는 경창의 양곡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도록 청원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으니, 허후가 대궐 뜰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니 좌우가 감동하여 드디어 윤허하게 되어 경창의 양곡을 운반하여 각처에 두고 의창의 형식으로 하여 죽을 쑤어 구제하고, 충청도 전라도의 곡물을 반입하여 종자를 공급하니 백성이 더욱 농사에 힘쓰게 되어 이듬해 농사는 풍작을 이루었다. 백성들이 그 덕을 찬양하였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세종이 탄복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1445년에 대사헌, 형조참판을 지냈고 1448년에는 예조판서,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552년(문종 2년) 지춘추관사로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좌천성이 되어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필했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허후가 대군에게 아뢰기를, 문종의 관이 아직도 빈소에 있고 어린 임금이 나라를 맡아 국정이 불안한 판국에 공자가 국가종신으로서 나라를 떠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만류하였으나 세조가 그 말을 듣지 않았지만 내심 옮은 말이라고 여겼다. 수양대군이 한명회 등과 더불어 계유정난을 일으켜 대신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는 정변에서 허후는 전일 명나라에 가는 것을 말린 일로 죽음을 면했다. 수양대군이 훈신들에게 정권을 잡은 축하연을 베풀 때 모두들 희색만면하여 즐거워 하였으나 허후는 홀로 슬픈 기색으로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수양대군이,
"공은 어찌 고기를 드시지 않으오."하고 물었다.
"오늘이 조부 기제일이라 삼가고 있소이다."
대군은 그것이 핑계인 줄 알았으나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수일 후 김종서, 황보인의 목을 효수하고 그 자손을 죽이니 허후가 극력 반대하였다. "이들이 무슨 큰 죄가 있어 죽이는 거요. 그들은 추호도 모반한 적이 없소이다." 세조가 비로소 화를 내며
"네가 전날 고기를 먹지 않던 그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제 알겠구나"하고 꾸짖었다.
"그러하오. 조정 원로들이 죄없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살아남은 것만도 족하거늘 어찌 차마 고기를 먹고 기뻐하겠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군이 격노하여 그 자리에서 중형을 내리려 하였으나 이계전등의 주장에 따라 허후의 재조와 덕을 애석하게 여겨 거제도로 유배하였다. 그러나 끝내 목매어 자결함으로 죽음으로써 불의에 항거하였다. 1353년(단종 1년)의 일이다. 그 후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어 사육신이 잡히자 세조가 "허후가 살았으면 육신이 아니라 칠신이 되었으리라"고 하였다. 허후가 실록청 감수관을 지냈으나 세조의 반대로 세종실록 편찬명단에서는 삭제되었다.

1747년(영조 23년) 세조에 의하여 삭탈되었던 관작이 복위되고 1790년(정종 14년) 정간공의 시호를 받았고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허후에게 후사가 없으니 동생 눌의 아들 조로 하여 대를 이었다. 조의 호는 응천이고 성품이 강직·엄정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제학 정인지의 선발로 호당(홍문관)에 나아가니 장차의 대제학의 인재이었다. 벼슬이 집현전 수찬에 올라 일시에 영광을 누리었다. 단종이 퇴위하자 성삼문, 백팽년과 뜻을 같이 하여 복위를 꾀하였다.

1456년 단종 복위의 모의 사건이 발각되어 화가 임박하자 매부 백촌 김문기에게 비장한 서신을 보내고서 의관을 정제하여 가묘에 배알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향하여 곡하여 절하고는 남으로부터 형을 받아 죽느니 보다 차라리 자결함이 바람직하다 하여 칼을 빼어 자살하였다. 실로 의를 지키는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고 하양 허씨의 장한 기풍이었다. 1790년(정종 14년)에 부제학을 증직받았고 역시 장릉충신단(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순절한 사람을 모신 단종의 무덤곁에 있는 별도의 재단)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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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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