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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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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

중통/경암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1369년(고려 공민왕 18년)
시대

상세설명

세상에서 말하기를 조선왕조의 정승이라면 황·허라고 한다. 황은 황희 정승을 가리키고, 허는 하양 부곡 출신의 허조를 말함이다. 세종 성세에 있어서 황희의 기량과 허조의 예행으로써 융성한 정치를 보필하였던 것이다. 조정에서만 공이 클 뿐 아니라 허조의 장자 정간공 허후, 정간공을 이은 수찬공 허조로 계승하는 하양 허씨 일문의 뛰어난 풍절은 허조가 세운 가풍과 유훈이 직접 간접으로 훈도한 바라고 본다. 허조는 1369년(공민왕 18년) 개성부윤 귀룡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통, 호를 경암이라 하였다.

어려서 양촌 권근의 문인으로 수학하였다. 1385년 17세에 진사가 되고 19세에 생원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 과거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조선 건국 후 좌보궐(후에 사간원 헌납에 해당함)에 특임되었고 봉상시승으로서 예제를 바로잡아 제도화하였다.

태조 6년에는 성균 전적에 올라 공자묘의 의식을 개정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 사헌부 잡단을 거쳐 완산부판관· 이조정랑· 집의 등을 역임했다. 1411년(태종 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처음으로 학당을 세우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등을 법전화하는데 조력하였고, 뒤에 병조와 이조의 참의를 거쳐 1416년에 예조참관에 승진, 이어 봉상시제조, 경기도 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로 승진, 대마도의 일인 입국을 제한하고 불법입국으로 구속 중인 왜인을 너그러이 다루어 돌려보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자의 향리를 순방하는 등 외교적 활약이 많았다. 1421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이조판서를 지낸 후 1438년(세종 20)에는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벼슬을 물러났다.

허조는 경서와 역사에 정통했으며 검소한 생활은 황 정승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타고난 성품이 공명정대하였고 어질었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에 열성이 많아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정좌하여 특히 소학과 중용을 정독하였다. 언동이 예절에 어긋남이 없고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고 친족과는 화목하며 벗에게는 신의가 있었으니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다. 1439년(세종 21) 71세로 서거하였고 후에 세종 묘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신위를 제향하는 하양의 금호서원에 선액을 하사하였다. 시호를 문경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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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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