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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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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침

헌지/이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444년
시대

상세설명

공은 양천인 허종의 아우로 1444년 조마면 상장암에서 태어났다. 자는 헌지, 호는 이헌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가 있어 한 번 읽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서 신동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1462년 진사시에 합격, 1475년 문과에 급제, 감찰, 전적을 거쳐 부교리.지평 등을 역임했으며 조위 등과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받기도 했다. 뒤에도 전라. 경상 양도의 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1504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공은 형 종과 함께 학문으로써 당대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당시의 석학(碩學)인 신종호. 조위. 유호인등의 학자들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세자(世子:연산군)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공이 필선(弼善)으로 세자인 연산을 가르칠 때 보덕(輔德)으로 조지서(趙之瑞)도 함께였는데, 연산군이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 뜻이 없자, 조지서는 왕께 고하겠다고 어르고 심지어 책을 던지기까지 했으나 공은 달래고 사리를 따져 가르치니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다."고 방안 벽에 붙이기까지 했다 한다. 이 일로 조지서는 연산군 즉위에 죽었지만 공은 더욱 승지되기도 했다.
공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연말에, 시문(詩文)을 바치라는 명을 받기도 했으며 1489년에는 삼강행실을 산정(刪定)했다. 공은 욕심이 없고 부드러우며 우애가 깊어 집안은 늘 한사(寒士)처럼 청백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에 뛰어났으나 남에게 드러내길 꺼려했다.

성종이 윤비(尹妃:연산군의 어머니)를 폐비시키려 할 때 '세자를 낳은 어머니를 가혹하게 다룰 순 없다!'고, 인륜을 들어 간하기도 했으며 폐비 결정의 자리에는 짐짓 참석치 않기도 했다. 여기 참석하지 않은 이면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공의 누님에 문행(文行)과 행실이 뛰어나고 지인지감의 식견이 높은 '백세할머니'(백세나 살아서)가 있었는데 집안의 어려운 일은 다 이 분에게 상담하여 처리했다. 페비론이 결정되던 날 자문을 청한 공에게 누님은, "윤비가 비록 오늘 폐비가 될지언정 세자가 있는 일, 어찌 다음 날은 재앙이 없을소냐?"고, 깨우쳐 주어 예궐하던 중 광교(廣橋)에 이르러서 짐짓 낙마하여 다리를 삔 핑계를 대고 폐모결정에 참여치 아니하였다. 뒤날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폐비를 주장했던 신하들이 모조리 화를 입었는데도 공은 무사히 화를 모면했다. 이런 연유로 공이 낙마한 광교를 오늘도 허침교(許琛橋)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은 늘 부드러운 속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 애썼고 우의정에 올라서는 죄수를 논하여 구제함이 많아서 당시 많은 선비들로부터 의로운 재상이라 칭송받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극악에 이르고 어떤 충간에도 회개하는 빛이 없자 공은 정무를 마치고 집에 오면 몇 번이나 피를 토하기도 했다 한다. 공은 1505년 결국, 분하고 답답함을 참을길 없어 홧병으로 작고하니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받았다. 그 부인 유씨는 남편의 시묘를 극진히 하여 조석으로 손수 전찬(奠饌)을 올리고 예를 지켜 중종 2년에 정려가 내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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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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