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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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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

동옥/고봉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한순의 자는 동옥이고 호를 고봉이라 하였으며 선조 때 사람이다. 임진란 때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맏형을 연달아 여의게 되니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한탄하였다."집안에 불행과 나라의 변란이 물밀듯 거듭 닥치니 어찌된 불행인고."
남들같이 의롭게 난리에 달려갈 겨를이 없었다. 충과 효는 별도의 갈레가 아니고 동일하게 시인되는 윤리관이 지배하던 시대이었다. 병화가 번지는 가운데이지만 예절에 따라 장례를 엄숙하게 닦았다.

그때 장질은 아직도 겨우 이갈이할 어린 나이이었다. 어린 것을 위함은 아버지와 형을 받드는 길이었다. 충효를 함께 온전히 할 수 없고 장질 경희와 아들 경조를 데리고 난리를 피하였다. 난리가 끝나고는 벼슬길에 나가서 영달할 것을 원하지 않고 성주에서 경산시 상방동 장고산 기슭에 이거하여, 장질을 돌보며 오직 독서에 전념하여 학문을 닦고 인성의 도리를 구명하며 조용히 사색하였다. 그가 독서 양정하던 집을 고봉초당이라 하였다.

재능은 짧고 뜻도 미숙하여 초당을 지킬망정
다행히 시내물과 산이 있어 취미는 넉넉하도다.
분수 밖의 뜬 형화를 탐내어 흡족하리
칡옷으로 몸 가리고 콩잎으로 배 채우리

한순의 심정과 마음의 경지를 여실히 엿볼 수 있는, 족함을 알고 하늘에 뜬 흰구름같이 담담하고 맑은 정신을 알 수 있다. 효행으로 현령 조형도의 주청으로 조봉대부 군자감 직장으로 증직되었다. 광해군 때 동족으로 호조판서에 오른 한찬남이 권신 이이첨에 아부하여 해주 옥사,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의 흉모에 앞장서자 한순이 통분하여 한찬남 아들 희에게 시를 주어 풍자하였다.

임금의 총애는 산 같이 무거운데
신자의 도리는 신짝 버리듯 가벼우니
가련하도다 지금 그대 효자여
아비의 시킴에만 따르고 잘못을 다투어 깨우치지 못하는구나

한순은 이 시로 연유하여 옥에 갇히어 무수히 국문을 받았지만 뜻을 꺾을 줄 몰랐고, 그후 풀려났다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안색도 없었고 사생을 도외시하여 태연하였다. 이익과 권세를 물리치는 한이 있어도 정당한 의견을 주장하여 굽히지 않는 선비다운 기풍이었다. 고을 사람이 한순의 집을 지나치면 손으로 가리키며 칭송하였다. 장질 경희의 후손은 남쳔면 금곡동으로 옮겼고 경희의 손자 홍익은 생원에 급제, 경산 문묘를 옥곡동에서 신교동에 옮길 때 조성도감으로 총지휘하였고, 고산 성동의 고산재를 1690년(숙종 16년) 이퇴계와 정우복 양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창건할 때도 도감으로 활약하였다.

이같은 한순이 처음 경산으로 이거한 후손 일족은 한순의 곧은 선비로서의 기풍을 이어받아 대대로 경산 사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왔다. 한동유는 한순의 10세손이다. 선조의 글과 행실을 이어받아 한일합방 전후에 있어 명리를 떠나 문장과 선비다운 유행이 뛰어났으며 이 고장 꺼져가는 사림의 종지부를 찍은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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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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