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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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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옹

/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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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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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공은 곡산인(谷山人) 관찰사 방좌(邦佐)의 아들이었다. 호를 정포라 했고 지품현(知品縣: 현 지례)에 살았다. 공은 넓은 아량과 총명 재질이 탁월했고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전제(田制) 개혁(공양왕 3년 완성)을 할 때 경상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온 장하(張夏)의 추천으로 사천감무(泗川監務)로 벼슬길에 올라 이조 태종 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올랐다.

공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길이 농민을 위함에 있음을 알고 농사장려에 크게 진력했다. 충청·전라 양도의 감전경차관(監田敬差官)으로 갔을 때는 지방관으로 자기 책무에 소홀한 자를 사심 없이 조정에 알려 파직케 하여 경각심을 일깨웠으며 돌아와서는 백성을 위한 수개조(數個條)의 헌책을 드려 다 공의 의견대로 시행되어 수차 지방관으로 현장에 나갔다. 공은 나갈 때마다 국가의 장래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여 태종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갔다.

태종이 신하들과 앉은 자리에서,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다. 국방력 강화의 밑거름이 농업에 달렸다. 한수를 막고 농민의 마음 높고 농사짓게 하는 일이 후민생(厚民生)이다. 일찍이 지방 수령에게 제방을 쌓고 수리시설을 완비하란 명령을 내렸으나 문풍에 젖어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더니, 도관차사 한옹만은 내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공의 공적을 인정했다. 이때 하륜(河崙)과 박신(朴信)이 아뢰기를, "한옹은 뜻이 백성을 위함에 있습니다. 마땅히 각도에 보내어 백성을 교화하고 농사를 장려하게 하는 게 적임자인 줄 압니다."해서 공의 업적을 뒷받침했다.

공은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조용히 물러날 것을 간청하여 지례에 와서 지내다 병으로 작고하였다. 공의 부름을 들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사흘을 철조(輟朝 : 공을 애도하여 공무를 쉼)하고 부의금을 내렸으며 시호를 평절공(平節公)이라 내렸으며 세종은 제문을 내리어 공의 죽음을 애도한 가운데, "법을 시행함에 삼가고 근실하였으며 검소하고 검약함에 양리(良吏)의 표본이었다. 충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상주고 벌주는 일에 정직하여 사심이 없었다."고 공의 인품을 찬양했다.

공은 한 마디로 명리에 젖어 안일하게 관록만 노리던 조선 초기에 국가 번영이 농업에 있고 나라의 주인이 농민이었음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진력한 실학적인 사상을 폈던 공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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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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