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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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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이

여경/석초
활동시기
근대이후
본관
청주
출생시기
1882년
시대

상세설명

대를 이어 나라의 원수와 맞선 의사 석초 한 양이 만고에 높푸른 도솔봉 정기 받고 어버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몸은 쓰러져도 나라를 놓지 않았던 맵고 곧은 한 선비가 있었으니 이 분이 곧 석초 한양이 의사다. 예천군 용궁면 송암리에서 묵랑 태섭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니 호는 석초, 자는 여경이며 본관은 청주로 준수한 기골과 활달한 기백에 대대로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위하는 가통을 이어 일찍이 한학에 통달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는 붓을 던지고 칼을 잡아 이 강년 의진의 참모로서 원수를 무찌르며 겨레를 달래다가 1906년 원통하게도 진중에서 병사하였는데 임종 때 의사를 불러「나라 사랑하는 내 뜻을 잊지 말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 때 의사는 23세의 청년 의병으로 아버지와 함께 의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의사는 그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싸우니 소백산과 낙동강 일대를 누비며 나라의 원수와 맞서 피 맺힌 항전을 거듭하여 의병의 서슬을 떨쳤다.

1907년 24세 약관으로 소모장이 되어 경북· 경북· 강원도 각 지방에서 많은 청· 장년을 이끌어 들여 강력한 의진을 보강하는데 막대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문경 갈평 전투에서 장 윤덕·민 긍호 의진과 합진하여 미하라 소위와 나가다니 경시가 이끄는 수비대와 경찰대를 섬멸시켜 대승리로 이끄는데 활약이 컸다. 1912년 의형제를 맺은 이 강년 의병대장의 아들 이 승재와 이 기하· 이 응수· 정 희섭 등과 같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5역 7적 및 일진회 간부들의 주살을 꾀하다가 탄로되어 이 승재는 분사하였으며 의사는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문경· 예천· 상주· 괴산· 보은 등지를 전전하며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고 항일투쟁에 앞장설 것을 역설하던 중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인 길림성 군정서의 독립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1922년 1월 이 응수· 김 찬규· 서 상업· 장 진우 등 동지들과 의용단을 조직하고 간부에 피선되어 군자금 40여만원을 군정서에 우송하는 등 대규모로 활동하다가 발각 되어 다시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옛부터 선비는 목숨이 끊어져도 뜻은 굽히지 않는지라 출옥 후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의 일꾼을 기르고 겨레를 일깨우며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돕다가 지명 수배를 받고 피신하는 등 평생을 구국투쟁에 바친 보람이 있어 조국 광복을 보고 1949년 돌아가셨다.

참고문헌 : 한양이 의사 공적조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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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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