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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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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장씨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임진왜란에 순절하여 우리 한국 여성의 굳은 절개를 떨친 두 분이니 이름하여 쌍절이다. 한씨는 (1569년∼1592년) 본관이 청주요 행의 따님이며 동래 정 영후 호는 매오의 아내이다. 정씨는 (1574년∼1592년) 매오 정 영후의 누이요 한씨의 시누이인 처녀다.

한씨 부인은 명문 출신으로 성품이 대쪽같아 휘지는 않는 마음을 지니고 자라나서 이 곳 용궁현 포내의 동래 정씨 가문으로 출가하니 요조 숙녀는 군자호구라는 글귀의 참뜻을 알겠더라! 시부모께 지극한 효도를 다하고 남편 모시기를 하늘같이하고 친척간에 온순 화목한 본을 보여 임사의 덕행을 지녔으니 칭송이 높았고 시댁이 대대로 효도와 우애를 이어 내려온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시누이 정 소저도 유한 정정한 성품과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으니 마치 한 가지에 핀 두 떨기 부용같더라. 이 단란한 가정에 불행을 몰고 온 임진왜란을 잠시 살펴보자.

1592년(선조 25년) 4월 보름에 왜장 소서행장이 15만 군사를 이끌고 부산을 침범하고 이어 동래성이 무너졌다 파발이 서울을 향해 달릴 때 싸움도 변변히 못해 본 채 군대는 흩어지고 백성은 어육을 겪었다. 열흘이 못 된 4월 22일에는 적의 선봉이 이 곳 용궁현 포내를 덮었고 24일에는 상주를 통과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요 국방을 굳게 하는 것만이 유비무환이란 교훈을 주는 것이리라.

이런 참화 속에 애궂은 백성들만 도륙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쌍절 일 가족은 연만한 모친을 모시고 이웃들과 대동산속으로 피난했으나 이곳도 안전한 은신처일 수는 없었다. 왜병이 십여 명 혹은 삼 사십 명씩 떼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 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장마까지 겹치니 그 정경이 오죽했으랴 오월 초승에 왜병들은 대동산 속까지 쳐들어 와서 행패를 부렸다.

이러한 때 한씨 부인과 정씨 처녀는 낙동강변 높은 바위에 올라 낙화처럼 강물 속에 뛰어 들었으니 이 때 한씨는 24세요 정씨는19세였다. 참으로 장한 정렬을 보이신 두 분이다. 정과 열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후일(1619년) 나라에서는 그 거룩한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정문을 내리고 이름하여 쌍절각이라 하며 두 분이 강물에 뛰어들 때 의지하고 섰던 바위를 쌍절암이라 부르게 했다.

지금도 우망초등학교 뒷편에 쌍절각이 우뚝 서서 400년을 하루같이 이 겨레에게 정절이 무엇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정씨는 그 일가들이 지금까지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제과에는 은행을 꼭 곁들인다. 은행은 마주 서야 열매가 맺는다는 수성에 연유하여 출가하기 전의 처녀가 난리를 만나 영결한 것을 위로하고자 함이리라.

참고문헌 : 우복정경세의 쌍절각 비문, 석문 정영방의 문집중 임진조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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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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