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자 굵게글자 크게글자 작게인쇄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하륜

대림/호정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진주(晋州)인데, 1347년(충목왕3)에 순흥부사 윤린(允麟)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365년(공민왕14)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신돈(辛頓)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좌천되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주의 발전을 위해 많은 치적(治積)을 남겼다.

그 첫째는 1368년(공민왕17)엥 영주향교(榮州鄕校)를 창건하여 성균관의 예에 따라 오성십철(五聖十哲)을 배향하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석전(釋典)을 올렸을뿐만 아니라 주민(州民)의 자제들을 입교시켜 교육하므로서 이 고장을 문향(文鄕)으로 발전시켰다.

둘째는 1371(공민왕20)에 제민루(濟民樓)를 건립한 것이다. 제민루는 본래 구성산 남록에 있었으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재(藥材)를 건조시키기 위해 지은 것인데 그후 향민들이 유영(遊詠)하는 곳이 되거나 왜정때는 학술강습회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1960년 대홍수 때 지금의 서천 신수로 단애(斷崖)옆으로 옮겨 놓았다.

셋째는 향서당(鄕序堂)의 건립이다. 이것도 구성산 남쪽에 세워 향중의 사림(士林)들의 자제들이 이곳에서 학업을 닦고, 향회(鄕會)를 열어 강론(講論)할 수 있게 하므로서 학풍을 진작시키는데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선정의 결과로 안겸사(安겸사) 김주(金輳)가 하륜을 치행제일(治行第一)로 나라에 상주(上奏)하여 지주(知州)에서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륜은 시문(詩文), 음양(陰陽), 의술(醫術), 지리(地理), 성경(星經), 등에도 정통하여, 영주의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했는데, 남쪽이 낫고 허(虛)하여 "인물로는 정승이 안나고, 천석하는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속언을 남기고 있다.

그 후 고려말과 조선초의 벼슬을 거쳐 1393년(태조2)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이태조의 계룡산 천도(遷都)계획을 반대하고, 풍수지리설을 들어 한양(漢陽) 천도를 적극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그리하여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전임되었다.

1398년(태조7) 정도전(鄭道傳)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로서 군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난을 평정하여 공을 세웠는데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定社)1등공신이 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2)에 좌정승(左政丞)으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왕조(王朝)의 완전한 인준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가지고 왔으며,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이첨(李詹)과 함께 편찬하였다. 그후 1409년(태종9)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로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을 지휘했다.

1412년(태종12)다시 좌의정을 지내고, 1416년(태종16) 70세로 치사(致仕),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왕명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한 후 귀로에서 졸하였다. 후에 태종 묘정(廟庭)에 배향하였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문집으로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3유형 : 출처표시필요,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담당부서 :
경상북도청
담당자
행복콜센터
연락처 :
1522-0120
최종수정일
2021-04-05
페이지 만족도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