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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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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팔원

죽포
활동시기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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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용성면 곡란동에 산 흥해인 참봉 난고 최응해, 그의 9대조 자는 이성계의 부름에 불응한 개성 두문동 72현의 한 분이었다. 증조부 때 청도 풍각에서 곡란동으로 이거하였다. 최응해의 두 아들, 장자인 죽은 팔개는 1560년(명종 15)에 태어났고 둘째 아들 죽포 팔원은 1562년에 태어났다. 숙부 응하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팔원은 어려서 숙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형제는 어려서부터 소학을 배웠고 용모가 괴위하여 보는 사람마다 장차 큰 그릇이 되리라고 칭찬하였다. 학문을 닦는 한편 마을 뒤 용산에서 무를 닦고 씩씩한 기개를 펴기도 하였다.

아우 팔원은 24세에 무과에 등제하여 승사랑 전생서 봉사에 이르렀다. 27세 때 모부인의 상을 입자 고향에 돌아와서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3년의 복을 벗고는 계속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고, 형과 더불어 바야흐로 수상쩍은 시국을 비분 강개하고 날마다 무를 닦았다. 팔원이 31세 때 임진년에 기어히 왜구가 대거 부산을 덮쳤다. 형과 더불어 항상 시국을 근심하던 터에, 전부터 팔원의 유능함을 알고 있던 동래 부사 송상현의 응원의 격문을 받았다.

형에게 수의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음이 있을 따름이오"하였더니 형 또한 "너가 의로써 일어나려는데 어찌 두메골짝에 몸을 피하여 있겠는가. 나도 너와 함께 가리다"하고, 지원하는 일족 및 마을 장정 28인을 거느리고 동래로 향하였다. 언양에서 적을 만나 30여명을 베고 그들의 말의 탈취하고 양산에서 또 적을 무수히 베고 범어령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송상현은 동래성 남문에서 독전하다가 순절하였고, 좌수사 박홍과 좌병사 이곽은 적의 세력이 심히 성함을 보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고 하면서 "원컨대 장군도 가지 마오. 공연한 죽음이 있을뿐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이오"라며 무모한 진격을 만류하였다.

팔원은 송상현이 이미 순절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송공이여 충신이로다. 어찌 조상하지 않을소냐"하고 그 길로 동래성에 다달아서 성밖에서 곡하며 송상현의 영을 제사하였다. 적이 포위해왔다. 팔개가 적탄에 부상을 입었지만 팔원은 그냥 말 위에 올라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 쏟아졌다. 팔원이 적장 조박붕을 베니 왜병이 놀라고 감히 덤비지를 못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 적이 역습해 왔다. 팔원이 적진으로 달려갔다. 적이 삽시에 다시 성벽 안으로 철군하였다. 따르던 종이 끝내 팔원을 찾을 수 없었다.

팔원이 송상현의 부름에 따라 신의를 지켜 달려갔고, 구름떼 같은 왜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워 죽음으로 나라를 위한 의를 지켰다. 팔개가 아우의 죽음을 알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고 제 역시 죽음으로 충절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의탁할 데 없는 조상의 제사를 생각하여 통곡하면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아우의 주검을 찾았으나 끝내 얻지 못하고 초혼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팔원의 의관을 묻어 장사하였다.

신과 의로 죽포 팔원이 장렬하게 죽었으나, 송상현은 이미 순절하였고 이를 증좌하여 조정에 상주할 길이 없었으니 나라에서 포상이 없었지만, 어찌 위국 충절에 포상이 목적이었겠느냐. 덧붙여 말하건대 안심에서 의거하여 남천면 일대에서 분전, 후에 권응수를 도와 영천성을 회복한 공훈으로 훈련원 부정을 제수받고 전상사한 최응담은 최팔원과 3종간이니 충의의 일족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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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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