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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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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

계승/인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63년(명종 18)
시대

상세설명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고장이 폐허가 되어 많은 역사적 유물이 전란으로 없어지므로 이를 걱정하시어 심혈을 기울여 지형 및 역사, 인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영역에 걸쳐 소상하게 나타낸 일선지(一善志)를 지으시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시면서 학문을 좋아하시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신 최 현의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이며 전주 최씨이다. 좌찬성 심(左贊成 深)의 아들로, 해평면 해평동에서 명종(明宗) 18년(1563)에 태어나셨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문장과 덕망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선생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글로 써서 선조(宣祖)께 올렸으며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생원(生員) 시험에 합격한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가 광해군(光海君)의 서울을 옮기자는 주장을 적극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으며, 한편 충청도 일원의 민심을 알기 위하여 암행하라는 명을 받고 돌아보시고는 세금이 공평하지 못하고 백성의 부담이 많아 살기 어려운 것을 임금께 아뢰어 이를 시정하기도 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어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라 급히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어전(御殿)에 나아가니, 왕이 "경은 지략이 뛰어나서 군무에 종사한 적이 있으니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출전하라. 그리고 이 칼을 줄테니 부원수 이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하라고 하였다.

선생은 어명(御命)을 받고 북으로 가서 전세(戰勢)를 살펴보니 이괄(李适)이 평안도 장정을 이끌고 당당한 기세로 계속 남진하고 있었으며 원수 장만(元帥 張晩)은 전세가 불리하여 남으로 후퇴하고 있는지라, 이 이상 더 후퇴하면 조정과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동요될 것이며 임진강을 저항 없이 건너게 하면 금 후, 사기(士氣)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하고 독전(督戰)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 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이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전투 보고서와, 지방 관원과 군관들의 거치와 전투행위 등을 기록한 서정장사권만행적(西征將士권慢行蹟)을 발표하였다. 인조는 전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이에 의존하였고, 선생은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64세때 8월에「강원도 관찰사, 순찰사,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많은 민폐를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북방의 호족(胡族)이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왔을 때, 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북방의 호족(胡族)지키게 하고 정예 군사를 뽑아 동해안으로 보내 해변을 지키게 한후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작성하여 각처에 발송함으로 영서(嶺西)지방 각처에서 큰 반응을 일으켜 의병이 조직되었다. 횡성현(橫城縣)에 거주하는 이거인(李居仁)의 모반에 관련 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죄인이 되어 서울로 호송되어 금부(禁府)로 투옥되었다가 회령(會寧)으로 유배(流配)된 후 왕명으로 풀려났다.

인조(仁祖) 15년 12월에 청병(淸兵)이 대거 침입해 오니 왕(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옮기어 적과 대치할 때 의병을 일츠켜 의병대장이 되어 조령산성(鳥嶺山城)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 치욕을 개탄하는 상주문을 올리시고 고향에 돌아와 학구에 전념하시며 동국통감(東國通鑑), 일선지(一善志)등의 책을 지으시고 국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국한문으로 되어 있는 선생의 작품 용사음(龍蛇吟)과 명월음(明月吟)은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용사음"은 임진왜란을 소재로한 3·4조의 가사로 당시의 전황과 사회상을 묘사했으며 "명월음"은 당시 흉흉한 인심을 풍자한 가사이다.

인조(仁祖) 18년(1640) 78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니 조정에는 순국보조공신 예조판서 완성군(純國補祚功臣 禮曹判書 完成君)이란 가자(加資)와 정간(定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송산서원(松山書院)에 향사되어 있으며,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 조선명인전, 번암 채제공 지은 신도비명, 선산군지, 인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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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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