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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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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휘

백옥/낙남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전주(全州)
출생시기
1578년(선조 8)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인재선생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8년(1578) 해평면 해평동에서 태어나시니 자는 백옥(伯玉), 호는 낙남(洛南)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일찍이 인재선생이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회령(會寧)으로 유배(流配)됨에 아버지의 무고함을 알리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궐문 밖에서 봉발(蓬髮)로 원통함을 호소하고 주야로 호곡하면서 삼동(三冬)을 넘기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추방할 것을 왕에게 상주하니, 인조(仁祖)는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어찌 효성에 다름이 있겠는가 비록 번거로우나 스스로 물러설때까지 내버려 두어라"고 하였다.

어느날 저녁 무렵 여느때 처럼 궁중 밖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는데 금부(禁府)의 도사(都事) 수향(秀香)이 지나다가 문득 옆으로 다가와서 "귀하는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내일이면 어른께서 밝은 세상을 만날 것입니다"하고 자세한 것은 저녁에 객사에서 이야기 하기로 약속하고 떠나갔다. 저녁에 수향(秀香)을 찾아가니 "유효립(柳孝立) 이 현 조정을 정복하고 인성군(仁城君)을 옹립할 만반의 계획을 높았으며 내일 새벽에 거사하면 도성 안팎에서 호응할 것이다"하고 하니 그냥 두면 광해군(光海君) 잔당에 협조하는 결과가 되고 이를 밝히면 창피함을 입을 것이나, 나라의 큰 일을 좌시(坐視)할 수 없다 하고 동향인(同鄕人) 탄옹 김경(灘翁 金頸)과 상의하고 고변서(告變書)를 작성하여 알리므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 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뜻하지 아니한 공신(功臣)이 되고 완해군(完海君)으로 봉군(封君)이 되어 충훈부(忠勳府)와 공신 회맹록(會盟錄)에 영사(寧社) 3등 공신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수하는 모든 관직과 하사하는 노비(奴婢)와 전결(田結)을 모두 사양하였다.

인재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낙남(落南)이 인조(仁祖)앞에 나아가서 성은(聖恩)을 사례하니 인조는 "과인이 전에 대신을 시켜 경의 아비를 다시 조정에 등용하려고 했는데 이미 노쇠하여 국정에 나설 기력이 없다고 하였다. 이번에 경을 선산부사로 제수할 터이니, 노부를 잘 봉양하도록 하라"하니 "자고로 지방 관원이 자기 고을의 장관이 된 일이 없사옵니다" "그러면 안동부사는 어떠한가" "안동은 신의 외가곳이 옵니다" "청송부사는 어떠한가 청송으로 내려가라" 하니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가 되어 내려와 선정을 베풀었으며 인조 15년 12월에 청병(淸兵)이 대거 침입하니 청송관군(靑松官軍)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에서 진격하든중 강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단기(單騎)로 서울로 가서 왕에게 분문(奔問)하고 돌아오는 길에 역질(疫疾)에 걸려 도중에서 객사하여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는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효헌(孝憲)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 심명세의 원정소, 선산군지, 인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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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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