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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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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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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말에 "부자가 삼대 가기 어렵다(富不三代)"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富)를 이루기도(創業) 어렵지만 이를 지속시키기도(守成) 어렵다는 말을 나타낸다. 그런데 조선(朝鮮)시대에 10대에 걸쳐 만석(萬石)의 부를 유지한 경주(慶州) 최부자(崔富者)의 내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희귀한 사례로서 오늘날에도 그 의의가 커서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경주 최부자는 경주 최씨의 시조 고운(孤雲) 최지원(崔致遠)의 19세 손인 재경(在卿) 최국선(崔國瑄: 1631~1682)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門派) 최준(崔埈: 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에 부를 누린 일가(一家)를 일컫는 말이다.

경주 최씨는 신라의 전신인 진한(辰韓)의 육부촌(六府村) 중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대인 소벌도리(蘇伐都利)공을 득성조(得性組)로 하며,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의 고운(孤雲) 최지원(崔致遠)선생을 시조로 하여 크게 24파로 나뉘는데, 그 중에서도 관가정공파(觀(稼亭公波), 사성공파(司成公波), 광정공파(匡精公波), 정랑공파(正郞公波), 화숙공파(和淑公波), 충렬공파(忠烈公波)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관가정공파와 사성공파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경주최씨교동종친회,1998,pp.1-2).

경주 최씨 사성공파는 조선조 초기에 사성공 최예(崔汭: 1373~1398)를 파시조로 하여 그 후 6대 손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 때에 다시 가지 갈림 하여 사성공파중 가암파(佳巖波)로 분파 되었다. 그리고 이 가암파는 정무공의 5남으로써 5개 지파(支派)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제 3남인 최동량(崔東亮: 1598~1664)을 파조(派組)로 하고 있으며, 그의 손자 형제 중 차손인 최의기(崔義基)가 경주 교동에 세거(世居)하는 최씨의 직계조이다(경주최씨교동종친회, 1998,p.2).

경주 교동에 세거한 최씨의 조상은 원래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하구리(下邱里) 구미산하( 尾山下) 일대에 세거하다가, 조선조 중기에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이조리(伊助里)로 이거하였으며, 직계조 최의기 이후에도 대대로 내남면(內南面) 이조리(伊助里)로 이조리에 세거하다가 조선조 순조(純祖) 때에 최기영(崔祈永: 1768~1834)이 그의 아들 최세린(崔世麟), 최세구(崔世龜) 형제를 데리고 현재의 경주 교동으로 입향(入鄕)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 최부자의 유훈으로는 가훈(家訓), 가거십훈(家居十訓), 육연(六然), 등이 있으나 가거십훈과 육연은 수신(修身)을 위한 가훈이라 할 수 있으며, 최부자만의 독특한 제가(齊家)를 위한 것으로는 7가지의 가훈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 것.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이지 말 것.
다섯째, 최씨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일곱째, 물건을 아껴 쓰고 이웃에 나누어 주라.

이러한 가훈을 현대적 의미로 요약하면, 근검 절약정신, 재산증식의 정당성, 적정이익의 추구, 정치적 중립성의 유지, 정보의 활용, 사회적 책임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전진문/이건. 경주최부자의 가업유지와 경영이념에 관한 연구, 경영연구, 2001. 8. pp. 26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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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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