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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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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시

형숙/송학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안동인 문경공 진의 후예로 1541년(중종 36년) 장암에서 태어났다. 자는 형숙이요 호는 송학헌이었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랐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공은 세조의 찬위 때 숨어버린 조부(군수공)이후 몰락해 버린 가문의 재기를 위해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한다. 이런 심정을 그는 번성했던 서울의 옛집을 생각하며,
가문이 몰락하여 몸은 남향(금릉)에 떠돌아
백수(벼슬없는) 생애를 초당에 부치었네.
구묘에 쌓이는 먼지 그 누가 쓸어주랴
주인없는 옛집 황폐해졌겠구려.
이몸에 온갖 시름, 흐르나니 눈물이요
늙은 몸 깊은 회한, 마음만 아프구나.
이땅에 새 삶을 기약은 하였지만
조상의 누린 번영, 한양땅이었네.

家漂身轉到南鄕 白首生涯奇草堂
舊廟生塵誰 掃 古園無主白荒凉
一身百慮垂雙淚 晩世幽懷只獨傷
此地縱營新契 先人有華漢之陽
라고 읊은 시에서도 공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1581년(선조 14년) 학행과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감역이 되고 이듬해에 사헌부 감찰을 거쳐 군위 현감으로 나갔고 다시 양구 현감으로 나갔으나, 천성이 세속에 얽매이지 못하는 성격이라 관을 버리고 귀향했다. 귀향 후 장암에다 정자를 짓고 송학지헌이라 이름을 붙여 문학에 전념하였는데, 한 때는 이 정자에서 하곡 허봉, 남봉 김첨(南峰 金瞻) 등의 당세 문장가와 시주를 주고받아 문명이 나기도 했다.

1587년(선조 20년)에 작고하니 향인이 사당을 세우려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그치었으며 미수허목, 판서 이원정의 서문과 발로 유고시집 <송학헌선생시집(松鶴軒先生詩集)>이 간행되었으며 묘소는 상장암(上狀岩), 같은 곳에 유허비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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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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