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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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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춘의3대

활동시기
삼국시대

상세설명

김흠춘(金欽春)은 사량부(沙梁部)사람이며, 진평왕 때에 화랑이 되었다. 3국이 통일되는 어려운 시대를 맞아 때로는 전선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으며 때로는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이바지한 공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문무왕 때에는 재상에 올랐는데 위로는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을 다 했고, 아래로 백성을 다스리는데는 어버이와 같은 마음으로 대했으므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보았다.

660년(태종 무열왕 7년)은 삼국통일을 위한 대진군이 개시되어 백제를 병합한 해이다. 그 해의 7월 9일에 김유신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신라군은 물밀 듯이 국경을 돌파하고 황산(黃山)벌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에는 백제의 용장 계백이 오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먼저 험한 지리를 이용하여 삼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군은 단숨에 백제의 진영을 짓밟아버릴 기세로 돌진해갔다. 그러나 백제의 계백군은 너무나 용감했다. 양군은 네 번 싸웠으나 싸움마다 신라군은 불리했다. 이 때 장군 흠춘은 아들 반굴(盤屈)을 불렀다.

아버지 장군의 부름을 받은 반굴은 흠춘 앞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부친의 명령을 기다렸다. 씩씩한 자식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흠춘은 명령을 내렸다. 반굴은 곧 적진으로 달려들어가서 힘이 다 할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아 신하로서의 도리와 자식으로서 할 일을 다 했다. 김영윤(金令胤)은 바로 이 용감한 화랑 반굴의 아들이며 명장이자 명재상인 흠춘의 손자이다. 그는 대를 이은 명문의 후예로 자라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조부와 부친의 충성을 이어받고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백제가 멸망되고 고구려 마져도 망한지가 10년이 훨씬 넘었다. 이 땅에 남아서 야망을 품고 있던 당나라 세력도 한반도 밖으로 물러갔으니 세상은 완전히 태평성대가 된 듯 했는데 뜻하지 않는 난리가 일어났다. 684년(신문왕 4년)에 있었던 "대문(大文)의 난"이 이것이다.

앞서 고구려가 망한 직후 가장 유력한 한파가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安勝)을 중심으로한 세력인데 후에 신라에 귀속하였다. 신라에서는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 세력으로 삼았다. 674년(문무왕 14년)에는 고구려왕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이라 하고 계속해서 금마저(金馬渚)에 있게 했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 세력까지 멀리 만주로 물러가고 신라의 근본정책이 중앙집권의 강화에 있게되자, 보덕국(報德國)의 존재도 말살시킬 필요성이 생겼다. 이래서 보덕국왕 안승을 신라의 귀족으로 삼아 소판(蘇判: 제3품위)을 내리고 성을 김(金)씨로 하여 서울에 머무르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고구려 유민의 반감을 사게되어 드디어 안승의 족자(族子)인 대문이 반란을 꾀하게된 것이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의 관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키게된 것이다.

대문을 실복(悉伏)이라고도 하는데 이 난은 초기에는 세력이 상당히 강대했다. 조정에서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했다. 영윤도 이 토벌군을 이끌고 실복의 잔당을 치게된 것이다. 그는 황금서당(黃衿誓幢)이라는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서 신라를 따르는 사람으로 구성된 중앙정부의 직속 군단 중 보병부대를 이끄는 보기감(步騎監)에 임명되었다. 신라의 토벌군은 가잠성으로 진격하여 성의 남쪽 7리지점에서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면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신라군은 작전회의를 열고 서로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 중의 한 장수가 말하니 모든 장수들은 그 말이 옳다고 포위망을 풀고 물러섰다.

그러나 영윤만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시일을 지체하는 것은 적에게 준비할 시간을 줄 뿐 아니라 고구려 유족들의 단결을 유도하는 결과가 되어 통일된 후 아직 얼마되지 않는 국내정세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까지 미쳐 생각할 줄 모르는 그의 종자(從者)는 강력히 영윤의 속전속결 주장을 반대했다. 영윤은 죽음의 장소가 바로 이 전쟁터임을 각오하고 적군을 공격했다. 죽음을 각오한 영윤의 용전은 참으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종횡으로 전선을 누비며 용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했다.

역사에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충성을 다한 예는 많으나 삼대가 하나 같이 충성을 다한 예는 찾을 수가 없다. 신라의 그 위대한 통일의 대업과 영광에 가득한 역사는 세계의 역사에 예를 찾을 수 없는 충성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새삼 머리가 수그러진다.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부친의 명령을 기다렸다. 씩씩한 자식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흠춘은 명령을 내렸다. 반굴은 곧 적진으로 달려들어가서 힘이 다 할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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