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김훤술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고려 왕건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여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으로, 해평김씨 시조(海平金氏 始祖) 이신 김훤술(金萱術)의 시호(諡號)는 장렬(壯烈)이시다.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몰아내고 숭신산성(崇信山城)과 어견평야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과 최후 결전을 벌려(태조19년 936년) 용맹과 지략으로 눈부신 공을 세워 통일 성업을 성취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해평현(海平縣)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공의 높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석상(石像)을 만들어 모신 사당을 영응사(靈應祠), 시중사(侍中祠) 또는 성황사(城隍祠)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석상이 지금의 오상동(가망지) 국도 변에 세워져 있을 당시에는 아무리 벼슬이 높은 분이라도 이 석상 앞에서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걷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벼슬 높은 분이 이곳을 지날 때 하인이 말에서 내려야할 사유를 말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석상 앞에서 타고 가던 말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지라 화가 난 그는 "어찌 석상이 길거리에서 길가는 사람을 방해하는고?" 하고 칼을 휘둘러 석상의 목을 쳤더니 땅에 떨어진 석상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한없이 흘러 내렸다고 하며, 이어 주민을 불러 이 석상을 낙동강에 끌고 가서 버리라고 명령하고는 다시 길을 떠났으나 얼마 못 가서 피를 토하고 즉고 말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해평 지방에는 고약한 병이 돌아 큰 변이 일어났다. 석상을 옮기던 인부들도 해평동 뒷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길거리에 방치된 석상의 주위에는 무서워서 아무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이곳을 지나던 스님 한분이 마을 사람에게 말하기를 " 이 석상을 다시 세워 모시고 그의 공적을 기리며 정성껏 제사를 지내면 마을이 평안 하리라"하고 일러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뒷산 양지 바른 언덕에 성화당을 지어 목 없는 석상을 다시 세워 모시고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병든 사람도 깨끗이 낫고 온 마을이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석상은 이곳 주민의 수호신으로 신봉의 대상이 되어 개인의 복을 비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며칠간씩 정성을 드려 큰 제사를 지낸다.

1973년 당시 경상북도 교육감 김주만씨가 사재 30만원을 들여 사당을 크게 개축하였으니 비록 오랜 세월을 두고 하나의 미신으로 신봉의 대상이 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나라에 충성을 다한 그의 높은 공적은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찬연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성씨대감(姓氏大監), 영응사기문(靈應祠 記文), 구전, 일선지(一善誌)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