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김호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김호는 1570년(선조 3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말을 잘타고 활 솜씨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나라를 경영하는 큰 듯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멀지않아 다가올 전란을 짐작하지 못한 조정대신들은 눈앞의 일에만 급급해서 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김호는 시대의 폐단을 걱정했으나 봉사(奉事)벼슬에 불과한 그로서는 가슴만 태울 뿐이었다. 뜻을 펼수 없었기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금오산 기슭의 옛집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을 익히며 세상을 잊고 살았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런 생활은 오래 가지를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저녁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14일부터 상륙을 개시하여 단숨에 부산과 동래를 점령하고는 김해, 밀양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이 부대에 이어 18일 부산에 들어온 가등청정(加藤淸正)군은 19일에 언양을 점령하고 21일에는 드디어 경주에 쳐들어왔다. 김호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모아 의병대를 편성하고 왜병을 공격했다. 부윤의 직무를 계속 맡아 있던 윤인함은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면서 경주를 수비하고 있는 왜병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는 김호에게 경주성외 서남쪽지방의 방위를 위임했다. 김호는 왜병이 대구지방과 연락하는 것을 끊기 위해 부산(富山)기슭에 매복했다가 시기를 보아 적을 칠 계획을 세웠다. 공격의 명령은 내려졌고 싸움은 시작되었다. 김호는 선두에서 적중에 돌격하여 이리 치고 저리 치는 틈에 우리 군사가 달려드니 왜적은 당할 수 없슴을 알고 줄행랑을 놓는다.

그러던 중 운명의 일전이 된 노곡전투(奴谷)의 날이 다가왔다. 전세는 차차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징조를 보이게 되었다. 남해에서 이순신장군에 의해 연전연승의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개가를 올린후 6월 초에는 당포(唐浦)에서 곧 이어 당항포(唐項浦), 율포(栗浦)에서 적의 수군을 깨뜨려 왜국에서의 보급로를 차단하더니 7월 8일에는 한산도(閑山島) 해전에서 적의 수군 주력부대를 남해의 바다 깊게 장사지내게 했으니 우리의 사기가 크게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세의 변화는 영남에서도 현저히 나타났다. 영남에서 왜적의 작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영천(永川)성의 전투였다. 의병대장 권응수에 의한 영천전의 승리와 그 수복은 적의 가장 중요한 보급로였던 경주, 영천, 안동을 잇는 길을 못쓰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양산, 밀양에서 대구를 거쳐 추풍령을 넘는 보급로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적은 아무래도 이 주 보급로선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경주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병량을 모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군의 꿈을 산산히 부서버린 것이 경주선전투였는데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신무기를 써서 무의공 박의장(武毅公 朴毅長)이 왜군을 섬멸했던 것이다.

노곡의 전투는 왜병들이 경주에 병력을 집결하고 있을 때 일어난 싸움이었다. 부산첨사로 부임하는 것을 포기한 후 김호는 초유사 김성일로부터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에 임명되어 군대를 재편성하고는 훈련에 힘쓰는 한편 경주 주변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천성을 잃은 후 왜병은 양산(梁山)을 근거지로 보급로를 재건하고자 경주에 병력을 증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양산성의 수비대장인 「이시카와야수카쯔(石川康勝)」는 정병 500명을 언양(彦陽)에 보내 휴식을 취한후 경주성으로 이동시켰다. 김호는 정찰병으로부터 왜병의 동향에 대한 보고를 받자 1,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다. 이 양군대가 서로 맞부딪치자 우리 군사는 함성을 울리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주사호가 이끄는 선봉에 이어 도대장 김호가 이끄는 중군이 합세하자 드디어 왜적은 노곡의 낮은 지대로 밀려났다.

김호대장은 말에 채찍하여 단기로 적을 쫓아 적이 도망치는 길을 막고 큰칼을 휘두르면서 닥치는 데로 왜병을 쳤다. 이 때 한 화살이 그의 말에 맞았다. 화살은 또 그의 몸에 꽂혔다. 이 때, 상처를 입고 땅에 엎드려 있던 왜적이 장창으로 김호의 허벅지를 깊이 찔렀다. 그는 단칼로 이 왜적의 목을 치고는 다시 앞에 달아나는 적장을 추격해서 그를 베어 죽이고는 말과 사람이 함께 쓰러졌다. 이 때야 뒤따라온 우리 군사들이 부축하니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앞으로 진격하라고만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끝났다. 완전한 승리였다. 그러나 김호의 부상은 깊었으므로 뒷일을 최진립에 맡기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노곡전투는 임진왜란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으며 임진년 8월 2일의 일이였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