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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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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용

덕보/수월제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김현용(金見龍) 장군은 1550년(명종 5년) 9월 15일 본군 대송면 사정촌(射亭村)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1620년(광해군 12년) 9월 9일 영일군 대송면 월동(月洞)제실(齊室)에서 돌아가셨다. 그의 묘는 영일군 대송면에 있다. 본관(本貫)은 수원(水原) 김(金)씨이고 자(字)는 덕보(德普) 호는 수월제(水月齊) 혹은 월동(月洞)이라고도 하며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의 위태로움을 알고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활약, 그 당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겸 방어사(防禦使)인 권응수(權應銖) 장군과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고 하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의병장과 화왕산성(火旺山城) 및 팔공산(八公山) 등지에서 회합(會合)을 하는 등 같이 활약(活躍)하였다고 전한다.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의 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의장 김현용은 의병대장으로써 위풍이 당당하여 어느 싸움이고 나설 때는 자신이 먼저 싸우고 부하들은 나중에 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높임으로써 군기가 더욱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전투명령을 내리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였다고 하며 휘하의 장병들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의 목을 벨 때마다 조정에 상신하여 그의 공로를 인정받자고 아뢰었으나 의장은 다시 부하들을 꾸짖으며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조그마한 일을 하였는 것에 불과하며 신하의 직분을 다할 뿐 어찌 감히 공을 말하겠는가]하고 거절하시면서 더욱 정신무장을 하며 군기를 확립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특히 여겨 절충장군(折衝將軍 : 조선시대 무반계급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의장은 [전쟁터에서 죽지 아니한 이 늙은이에게 무슨 공이 있으리요] 하면서 부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이 끝이 나고 고향인 연일현 사정촌에 월동제(月洞齊) 실을지어 은거(隱居)하셨다고 전한다.

1819년(가경(嘉慶) 23년)에 경상좌도진사(慶尙佐道進士) 이주보(李周輔)씨외 72명이 조정에 수월제 김현용 장군의 충열사적(忠烈事蹟)을 상소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와 권응수 등은 나라에서 영광된 보상을 입었으나 김현용 의장만이 보상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임란시 전과(戰果)에 대한 것을 낱낱이 보고하여 1828년(순조 28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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