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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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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영

준백/눌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637년(인조 15)
시대

상세설명

공은 김해 김씨로 이조판서 불비의 8세손이며, 자를 준백 호를 눌암, 1637(인조 15)년 감천 하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즐겨했고 언행이 엄하고 무거우며 바랄 아이라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절의를 지켜 서쪽을 향해 종신토록 앉지 않았으며 향리에 숨어 살며 벽에다는, <창해고도(滄海高蹈) : 중국에서 제나라의 의사로 지나라가 황제 칭호를 쓰려던 것을 거부한 고사에서 생긴 절의를 나타내는 말)> 넉 자를 크게 써 붙이고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통탄했다 한다. 미수 허목은 공을 일컬어 숭정처사라 글을 써 기렸으며 명재 윤승은 시를 써서 중국의 유명한 절의파 소부·허유에다 공을 비기기도 했다.

공은 의사이기보다 효자로 이름이 났으니, 아버지의 병이 위급할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림으로 희생시키는가 하면 종기가 나서 고통을 못 참는 아버지를 보고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완치시킨 효성은 남들을 경탄하게 했다. 또한 어머니가 병이 깊었을 땐 그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짐작해 가며 약을 드려 낫게 하는가 하면, 겨울에 어머니가 가지를 먹고 싶다 하여 구할 길 없는 공은 울면서 하늘에 기도드리기 며칠, 양지바른 곳에서 천행으로 가지꽃을 구해 약을 해드리니 병이 나아 일어선 기이한 일도 있다 한다.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통하여 아침 저녁으로 그 묘소를 찾아 곡하며 애도하였는데 호랑이가 따라다니며 호위해 주었다 한다. 특히 부모의 제사에 바칠 고기를 사지 못해 애타할 때 꿩이 저로 집으로 날아들어 젯상에 고기를 쓸 수 있었다 하니 공의 효성은 하늘에 닿았다 할 만하다. 나라에세 이 효성에 급복호하여 찬양하였으며 1712년에 작고하였다. 1978년 감천면 금송동에 신도비를 건립하여 절의와 효행을 길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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