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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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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중

정이/웅봉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의성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점곡면 사촌동(중리)에서 태어난 김치중은 석의 20세손이다. 자는 정이, 호 응봉. 본관은 의성 연산군때 시인 송은 김광수가 그의 외조부요, 임진란 공신 서애 유성룡과는 이종간이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애의 문인으로 학문을 부지런히 익히고 착실 중후한 성품을 지녀 장래가 크게 내다 보였다. 평화롭던 이 나라가 뜻하지 않게 국란을 만났으니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왜적들은 15만 대군의로 부산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나라 안은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전진의 소용돌이 가운데 휘말리게 되었을 때다.

공은 포의로 좌시만 할 수 없어 불타는 애국심으로 국란 극복의 기치를 올려 향리의 용감하고 씩씩한 장사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아우 치화, 종제 치홍, 치강, 치공 및 숙부 응주 등 일문 5종반 1숙을 앞세우니 비록 전쟁 경험이 없는이들었지만 나라를 지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충성된 마음으로 뭉쳐졌기에 그 사기는 충춘하였다. 이와 같은 의기는 몰려드는 수천의 적군을 단숨에 무찌를 작전으로 동북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그 앞으로 미천강이 흐르는 천연 요새인 건마산(속칭 성재)에 진을 치고 그 산 동북편 강 건너 비대골에 수천의 허수아비를 세워 병볼을 가장 적을 유인하는 계략을 짰다.

드디어 그 해 7월 초하루, 마을을 공략하는 도적무리 왜군과 접전하여 서로 죽이고 죽음을 당하는 격전을 거듭하는 동안 우리 의병들은 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왜군이 가진 우수한 조총의 화력과 이리떼처럼 몰려드는 그들의 인해전술 앞에 전세는 날로 불리하여지고 의병의 수도 점점 줄어만 갔다. 이 때 왜군은 서남방으로 그 주력을 돌려 쳐들어와 이를 막으려고 용전분투하였으나 끝내 이를 방어하지 못하고 아우(치화)를 비롯 숙부(응주), 종제(치홍,치공)는 차례로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은 천운이 다함을 깨닫고 적이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한지 4일만에 의를 욕보이지 않으려 하여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호국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장렬하게 순국하니 그의 아내 신씨도 남편의 뜻을 따르고 아울러 노비 복분이도 통곡하며 그 뒤를 쫓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종제(치강)도 공의 뜻을 이어 스스로 순국하니 그 부인 권씨는 "한 몸의 의로움을 지키려고 모두가 이렇게 순절해 버리면 김씨 일문의 이 장한 사실을 누가 후대에 전하며 어떻게 교훈하고 또한 장차 이 땅을 누가 사수할 것인가" 하고 통곡하니 그의 애절한 곡성은 강을 건너 들판을 메아리쳤으리라. 뒷 사람들은 이같이 남편은 나라 위해 순국하고 아내는 남편 위해 순절하며 노비는 주인따라 목숨 바친 이 죽음을 삼강이라 일컬어 칭송하여 맞이 하였다.

김의가 일문의 이 의로운 장거는 난 후 조정에 알려져 나라에 정려를 명하니 1609년(광해군 원년)에 "남자의 뜻 굽히지 않고 의로써 마치니 죽음이 아니로다" 란 요지의 맹창 정사신이 엮은 빗돌을 세웠고 그 비각까지 이룩, 후학으로 하여금 향사케 하였다. 그 후 공의 10세손 서화가 3백년이나 풍우에 시달려 낡아진 비각을 1903년(광무 7년)에 다시 이룩, 일제때 일관현이 그 비문 일부를 말소하고 비석을 파손하여 땅에 묻어버렸는데, 광복 후 점곡 초등학교 박교장과 유 학회장의 인도로 중론이 호응하여 7백여 학동들의 손으로 발굴하여 입석했다.

1956년 지방유지들과 당국의 협찬으로 세번째로 새로운 비석이 세워지고 비각을 말끔하게 수리한 것이 현존하는 의열각이다. 이 비각은 지금 송내동 한길가에 말없이 서서 남녘에 우뚝 솟은 성재(건마산 절벽)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한테 국란을 위해 삼강을 다한 김 의가 일문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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