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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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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축부자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김 축은 선조때에 함안 군수 응시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함녕이다.
어릴 때 부터 총명하고 강직하며 의지와 기개가 남달랐다. "남아로 태어나 싸움 터에 나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시체가 말 가죽에 쌓여 돌아오는 것이 도리다." 김 축은 항상 이렇게 남자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상주 함창 문경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김 축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고,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의 막하 군관이 되어, 걸망포 해전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뒤에 용양위호군이 되어 문열공 김천일의 진중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함안 남원 등지에서 역전고투 끝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진중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아들 영달(1591년-1636년)은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참변을 당했다. 영달의 어머니 정부인 청주 한씨는 왜적을 피해 지평리의 뒷골 대나무 밭에 숨어서 살면서 어린 아들 영달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장한 죽음을 되새겨 주었다. 이렇게 엄한 어머니의 교훈을 받으며 자란 아들 영달은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마음으로 앉을때나 누울 때는 왜놈의 나라인 왜국을 향하지 않고 왜놈식의 물건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병자호란 때 영달은 향리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본도 병사 민 영이 진에 합세하여 분전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역시 시체를 수습할 길이 없었다. 혼을 불러 와 향리의 뒷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예로부터 충효의 극치는 한 집 안에 한사람 혹은 한 마을에 한사람도 어렵거늘 김축은 그 부자가 충과 효를 다하였다. 참으로 거룩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라에서는 두 부자의 충효를 기리어 아버지에겐 자현대부 호조판서를 아들에겐 통정대부 승전원 좌승지를 증직하고 고향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지금 지평리에는 충효각이 세워져 두 부자의 충효를 영원히 기리고 있다. 영달의 모자가 피란하여 살던 대나무 밭에는 첨축재가 세워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흠모와 칭송을 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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