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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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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대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지대(지대)요 초휘(初諱)는 중용(仲龍)이고 본관은 청도(淸道)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며 고조의 휘는 순보(順補)이고 관직은 중서령(中書令)이였고 증조는 좌승선 세익(左承宣 世翊)이요 조부는 동정 봉기(同正 鳳麒)이며 시중 여흥(侍中余興)의 아들로서 1190년(고려 명종 20년)에 청도 대성리(淸道 大城里)에 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풍자가 위대하게 생겼고 총명하기가 신과 같아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기였다. 성장함에 따라 시서와 육예(六藝)의 문을 통하여 무리 가운데 우뚝서서 그 모양이 남에게 구속되지 않고 큰 뜻이 있고 힘써 배워 학문에 능통하였다.

1218년(고려 고종 5년)에 글안병(契안병)이 크게 쳐들어오니 조야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아직 벼슬길에 기록되지 못한 생도들은 모두 종군 시켰는데 선생은 그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였다. 그 당시 모든 구산가 다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리되 선생은 홀로 시 일절을 지어 쓰기를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 어버이의 걱정은 아들의 걱정이니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을 양이면 충성과 효도를 한꺼번에 닦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원수 문정공 조충(元帥 文正公 趙沖)이 군사를 호 하다가 이를 보고 크게 기특 알맞은 일을 보게 되었다 .이듬 해 봉에 나아가서 강동(江東)에서 글안(契안)을 쳐부수고 개선하였을 때 문정공 조충장군(文正公 趙沖장군)이 공거(貢擧)를 맡아보았는데 선생을 문과에 장원으로 뽑으니 전주사록(全州司祿)에 임명되자, 어리석고 약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세력 있고 강한 자를 억제하고 간악한 것을 적발하는데 신과 같이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1243년(고려 고종 30년)에 비서고감(秘書少監)에 오르고 이때에 몽고왕이 죽고 여왕이 정치를 하게 되어 우리 나라에 침범하지 않게 되었으니 두 나라의 사신이 가고 옴이 끊어지지 않게 되어 이해에 왕이 추밀부사 최린(樞密副使 崔璘)에게 명령하여 상사를 삼고 선생은 부사(부사)가 되었다.
1247년(고려 고종 34년)에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내다. 1255년(고려 고종 42년)에 이판재감사(以判司宰監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58년(고려 고종 45년)에 이판사재사가 되고 5월에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랐다. 그때에 몽고병이 북변을 침범하여 우리 나라의 서북 여러 성을 잃게 되었는데 이는 병마사(兵馬使)인 홍희(洪熙)가 여색을 즐기어 군무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한 지방의 민심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재략(재략)을 믿고 홍희(洪熙)를 대신하여 출진케 하니 선생은 은혜와 신의로서 다스리니 서북 40여성이 힘을 얻어 편안하게 되었다. 선생은 이 공훈(功勳)으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오산은 청도의 고호:古號)

(참고문헌:인명대사전,국사대사전,도주지,도주문화,영헌공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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