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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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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건

성구/경성재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김녕
출생시기
1840년(헌종 6년)
시대

상세설명

김주건은 1840년(헌종 6년) 8월 1일에 안동군 풍산면수동서 났다. 자는 성구(聖九)요, 호는 경성재(敬省齋), 본관은 김녕(金寧)
어릴 때부터 안맹한 그는 효성이 놀라왔고 특히 그 노모 봉양이 극진하여 늘 식성에 맞는 음식과 거처의 불편도 줄이도록 힘썼다. 이 곳 신평면 덕봉동으로 이거한 이래 어머니가 병환으로 수족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공은 늘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공궤를 잘 해왔다. 1858년(철종 9년) 그 나이 열 여덟일때 봄 농사일이 시작되어 집안 식구들과 이웃 사람들은 모두 들에 나가 보리를 가는 등 일을 하고 있어 마을은 텅 비었는데 우연히 그의 집에서 불이 났다는 전갈이 있자 공은 헐레벌떡 엎어지고 자빠져 가며 난데없는 회오리 바람이 어머니가 계신 방에서 일어 그 방만은 타지 않았고 어머니도 무사하였다 한다.

또 어머니께서 때아닌 6월 달에 홍시를 먹고 싶다 하여 공은 감나무 밑에 앉아 치성껏 빌고 비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홍시가 떨어져 그걸 얻어 어머니께 바쳤으며 한 번은 꿩고기가 어머니 병환에 특효하다는 말을 듣고 눈먼 몸으로 산을 헤맨지 며칠만에 우연히 손에 잡히는게 있어 더듬어보니 틀림없는 꿩이라 집에 갖고와 요리하여 드렸다고 하니 이 모두가 그의 지극한 효행소치였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알려지자 고을 선비들은 그의 갸륵한 행적을 들어 조정에 천거하여 1884년(고종 21년)에 정려의 명이 내려지고 홍문이 그의 집앞에 세워졌다. 1900년 4월 26일 61세로 타계하였다.

그가 살던 심평면 덕봉동 깊은 산골집에서는 1979년 2월에 허물어진 홍문 일부를 증축 뒤엔 '경성가'현판이 걸려 있고, 마을 앞 한길 가에 정려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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