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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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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점필재(點畢齋)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선산(善山)
출생시기
1431년(세종 13년)
시대
조선시대

상세설명

1431년 (세종 13년) 6월에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낸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밀양부(密陽府) 서대동(西大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산 영봉리 사람으로, 동향인 길재의 성리학을 이어받어 아들 종직에게 전수하여 뒤에 영남학파의 종주로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숙자는 밀양의 박홍신의 무남독녀에게 장가 들었다가 장인 박홍신이 대마도에 나아가 싸움터에서 전사하자 밀양 처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종직을 낳았다.

종직은 어릴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총명하여 날마다 수 천자씩을 기억해 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교육은 길재의 교육방법을 따라 동몽수지.유학자설.정곡편을 거쳐 소학, 효경, 대학 및 논맹 순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철저히 밟고, 사서.오경을 차례로 배웠지만 특히 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고 어릴때부터 시를 잘하여 이름이 크게 떨쳤다.

16세때 향시에 응시하였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발하여 21세에 금산 봉계의 현감 조계문의 딸을 맞아 결혼함으로써 김천과 깊은 인연을 맺고 김맹성과 공부하고, 이듬해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주역등 경전을 탐독 하였다. 25세에는 세조 즉위를 축하하는 증강시에 중형 종석과 함께 응시하여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밀양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복상여묘하였다. 29세에 형 종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로써 벼슬길이 열려 곧 근지영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는데 그 문명이 조정에 널리 알려져 형과 함께 한직을 주어 금산 출신의 허종. 이숙감을 비롯하여 어세공.이극균.어세결.민수.정효상.이영근 등을 선발하여 사가독서케 하였다.

이때부터 문명으로 유명하여 각종 책문을 임금께 올릴 정도이었다. 세조는 학문을 권장하는 방책으로 대표적인 연소한 문신을 뽑아 한직에 제수시키고 예문관의 직까지 겸하게 하여 매일 번갈아 토론 강습토록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종직은 이파.정간종.이맹현.김종연.어세공.류문통.정영통.송춘림.김순명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40세에는 성종이 즉위하여 재행이 겸비한 학자를 선발하여 예문관을 겸직케하였는데 종직이 이에 뽑혀 홍문관수찬 지제교에다 경연검촌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하매 고향 가까운 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군을 다스림에 있어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실천하였고 춘추로 향음례와 양노례를 행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김숙자의 교육방법대로 소학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문하생이 운집하였다. 수제자 김굉필.정여창이 이때에 수학한 제자이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시되 종직은 고을을 다스리는데 명성이 높음에 특별히 발탁하여 승문원 참교로 임명하셨다. 그후 얼마 안되어서 고향인 선산부사로 부임했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삼년을 묘 옆에 띠집을 지어 지내면서 상례의 모든 절차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으며 슬퍼함이 지나치니 모든 사람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

김산지(金山池) 위에 서당을 지어 그 곁에 연꽃을 심고 집의 호를 경렴(景濂)이라 하니 주렴계(周濂溪-中國사람)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매일 그 집에서 시문을 읊고 제자를 가르치며 세상 일에 뜻이 없었으나 다시 홍문관 응교로 부르시니 병이라 칭탁하고 사양하였으나 임금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부득이 벼슬길에 나가니 임금님의 총애가 지극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니 선생이 감당하기 어려움으로 사양하였으나 임금님이 말씀하시기를 "경의 문장과 경륜은 족히 감당할 것이니 사양치 말라."하시고 곧 이조참판 동지경연사로 제수하시고 금대(金帶)한 벌을 하사하여 대우를 달리하였다.

그 후, 공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 홍문관 제학을 겸직하였다. 성종20년(1489)에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여 지중추로 벼슬을 옮기고, 밀양으로 돌아오니 임금님이 특별히 벼슬을 바꾸지 말라하시고 녹을 주었으나, 받지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글을 올리며 사양하니 임금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어사품을 내리셨다. 가세가 빈한함을 듣고 본도에 하명하여 쌀 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성종 23년 1492년 8월 19일에 62세로 돌아가니 부고를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고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고쳤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부친 김숙자에게 수학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요시하는 조선시대의 도학의 정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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