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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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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

/농암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일선. 순춘공 의 후손이며 백암선생의 동생으로 이름은 주(澍) 요 호는 농암(籠岩)이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홍무임신(洪武壬申 1392년)에 하절사(賀節使)로 중국에 가시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시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조선 건국소식을 들으시고 통곡하시면서 부인 유씨(柳氏)에게 서신을 보내여 결별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내가 강을 건너면 몸둘 곳이 없노라. 내 부인이 잉태중임을 아노니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陽燧)라 하고 딸을 낳으면 명덕(命德)이라 하라. 그리고, 입었던 관복(官服)과 신을 보내니 후일 부인이 돌아가시거든 합장(合葬)하여 우리 부부의 묘로 하고 묘앞에 비문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것이며 내 일을 후세에 알리지 말고 내가 서신 보낸 날을 나의 기일(忌日)로 하라"하였다.

드디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중국 대명황제(大明皇帝)에게 조선을 정벌하고 고려를 다시 건국할 것을 주청하니 명제(明帝)께서 말하기를 "국가의 혁명은 하늘에 있으니 한사람이 있으니 충절로 써 회복할 수 없다."하고 허락하지 아니 하였다. 선생은 신하의 의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중국에 있을 것을 청하니 그 충절을 가상이 여겨 중국에서 예부상서(禮部常書)의 벼슬을 내렸다. 벼슬을 사양하고 형초(荊楚)에서 고려를 사모하며 충절을 지키니 상서록을 주어 여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당시에 만약 강을 건넜다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해와 달 같은 충절은 고국을 등지고 처자를 헌신짝 같이 버리며 나라 망한 한을 품은 채 형초(荊楚)에숨어 살았다. 이역만리에서 일생을 보내고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의리에 따라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다한 충의의 일생이였다고 하겠다. 후손이 마지막 서신 보낸 12월 12일을 제사날로 정하여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고려 두문동 72년(杜門洞)의 한분이시며 조선 정조(正祖) 20년(1796)에 시호(詩號)를 충정(忠貞)이라 내리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신하를 보내 치제(致祭)를 하였다. 부조묘(不廟)와 제청(提請)인 충렬당(忠烈堂)과 신도비가 도개면 궁기동에 있으며 안동 고죽서원(孤竹書阮),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동진사(東津祠)에서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삼인록(三仁錄), 쌍절기( 節記), 일선지(一善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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