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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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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묵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해산(海山)이며 일명 국빈(國賓)이다. 1888년 고아면 원호동(들성)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불만을 품고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북경 서성중국대학(北京西城中國大學) 정치과(政治科)를 졸업하고 1915년 중국동삼성(中國東三省) 장작림휘하(張作霖揮下) 곽송영부대에서 소교(小校)로 군인생활을 하다가 1918년 일시 귀국하여 장진홍 의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3·1운동이 실패하자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 동창인 소한삼씨와 함께 한국인 교육을 위하여 북경시외 향산자유원을 설립함과 아울러 1920년 자주독립과 항일사상 고취에는 교육기관 설립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북경서직문외만수산정문(北京西直門外萬壽山正門)앞 팔만정에다 교사를 마련 만수산집의학교(曼壽山集義學校)를 창설하고 한국인학생만 인재를 교육시켰다.

또 단재 신재호와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여「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광복운동을 하여 정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시국을 수습하며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해 혈전을 피한다」는 내용의 통일 책진을 얻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인 움직임은 이례적인 것이기는 했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그의 신망과 일제에 대한 무장독립 투쟁이라는 그의 주전론적(主戰論的) 입장을 그대로 반영할 것이다.

1924년 중국군대에 다시 입대하여 재동북 육군제19여단사령부 군법처장으로 상교계급으로 있으면서 한국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상해임시정부를 도왔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군복을 벗고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이름을 김국빈으로 개명, 북경에서 지하독립운동의 총지휘와 연락책으로 홀동하다가 1938년 북경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북 나남경찰부에 이송되어 심한 고문과 옥고생활을 하던중 만주에 밀파한 동지 황귀호의 교습과 노력으로 신원을 보증하고 5개월만에 석방 되었다.

또 다시 북경에서 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남과 북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다가 조국광복 일년전 돌아가시니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1963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28859호)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포상신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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