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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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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백암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일선. 순충공 선궁(順忠公 宣弓)의 후손이며, 찬성사 원로(贊成事 元老)의 아들이다.

이름은 제(濟)요 호는 백암(白巖)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난 11세에 아우 농암(籠巖)과함께 노자 바위에서 꽃 구경을 하다가 형제가 각각 시 한 구절을 지으니, 선생은 "바위는 물굽이에 깎이고 깎여 천충이나 희어였도다"고 하였더니 동생 농암이 화답하기를 "붉은 노을은 물에 떨어져 한 폭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도다"하였으니, 이때에 농암은 8세 였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형제가 함께 벼슬에 나아가니 고려 공양왕(恭讓王)때 선생은 조봉랑(朝奉郞)으로 평해 군수에 재직할 때 고려의 국운이 다 하여 망국의 슬픈소식을 듣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통곡하며 이름을 제해(濟海)라 고치니, 중국 제(齊)나라때 나라를 위하여 동해에 빠져 죽은 충신 노중련(魯仲蓮) 과 같았다.

선생은 시(詩)한수를 지어 바닷가 큰 바위에 써 두고 12월 22일 떨어진 의관(衣冠)으로 돛단배를 타고 망망한 동해로 가셨으니 어디로 가셨는지 알 길이 없다.

평해 벽상시(平海 壁上時)에
배를 불러 동으로 노중련(魯仲蓮)의 나루를 묻노라
오백 년 끝난 나라 슬픈 신하의 몸
내 외로운 넋이 죽지 않는다면
원컨대 해와 달 따라 중원에 비치리
라 하였으니, 분명히 나라 망한 슬픈 한을 안고 바다에 빠져 순국(殉國)한 것이리라.

오래도록 이와 같은 사적이 없고 오직 전해 오는 말만 듣고 있다가 1785년(정조 9년)에 농암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내격묘(來格廟)를 중수할 때 상량문(上樑文)에서 일부 사적을 발견하고 그 후, 4년이 지나 구성(구성)에 사는 한 선비의 집에서 해동시보(海東詩譜)에 기록된 벽상시(壁上時)를 발견하니 당시에 실적이 비로소 세상에 빛나 나라에서 충개(忠介)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1798년(정조 22년) 9월24일에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신하를 보내어 도해(蹈海)하신 곳에 치제(致祭)를 하였으며 안동 고죽서원(安東 孤竹書院), 충절사(忠節祠), 기성(箕城), 백암서원(白岩書院), 운암서원(雲岩書院), 동진사(東津祠)에서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으며, 상주 낙동에 신도비와 부조묘가 있다.

※ 참고문헌 : 쌍절기(雙節記), 일선지(一善誌), 서경보(徐鏡普)가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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