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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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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순중/상촌
활동시기
고려시대
본관
출생시기
1351년(충정왕 3년)
시대

상세설명

" 평생 충효의 뜻 금일에 뉘 알리요, 한 번 죽어 원한의 눈 감으면 저승에서라도 알아 줄 이 있으리."
이 시는 상촌 김자수 선생이 고려의 유신으로서 이조 태종의 부름에 응할 수 없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며, 남긴 전명시이니 선생의 뜨거운 충성심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김자수선생은 경주 김씨로 자는 순중이고, 호는 상촌이니 신라 경순왕의 후예 통례문 부사 오의 2남으로 1351년 상촌(현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10세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선생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었으며,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형인 전서공이 관직을 따라 집을 떠났기 때문에 상촌 선생이 고향 집에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19세 때 어머니는 집을 떠나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선생은 형인 전서공도 없는데 자기마저 연로하신 어머니를 홀로 두고 집을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어머니의 뜻이 완강하여 개경으로 가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선생이 성균관에 들어간지 채 1년이 못되어 어머니가 병이 들어 선생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형인 전서공과 더불어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장사 지낸 선생은 산소 옆에 모막을 짓고 시묘하였는데, 3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어 지나가던 나그네와 나무꾼들도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의 이러한 효심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의 학자로 목화씨를 처음 우리 나라에 들여와서유명한 문 익점 선생은 직접 상촌 선생을 찾아와서 그 정성어린 효성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그후 공양왕 때 조정에서는 상촌 선생의 효성을 기려 선생이 살던 안동 남문 밖에 <효자 고려도 관찰사 김자수의 마을>이라고 쓴 효자비를 세우게 했고, 조선 성종 때 '동국 삼강 행실도'란 책을 편찬할 때 선생의 충성과 효행의 일을 기록하여 후인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시묘가 끝난 다음해인 1274년 선생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덕녕부 주부를 거쳐 우왕 때는 간관인 좌정언으로 승진했다.

당시의 조정에세는 왜구의 노략질로 그 피해가 매우 심하여 조 민수를 경상도 순무사로 보내어 막게 했으나 도리어 연이어 패배만 하였다. 마침 조 민수는 진주에 왜구와 싸워 처음으로 10여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는데, 왕은 그 공을 과대평가하여 지나친 상을 내리자 선생은 왕의 상벌이 공평치 못함을 당당히 아뢰었다. 이에 노한 왕은 선생을 돌산(전라 남도 여천군에 있는 섬)으로 귀양보냈다. 4년 만에 귀양이 풀린 선생은 다시 관직을 내렸으나 사직하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공양왕은 선생에게 간곡한 칙령을 내려 다시 관직에 나오기를 명하였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 많은 선배 동료 학자들이 같이 힘을 합하여 어려운 나라를 바로
잡자고 권하였다. 상촌 선생은 간곡한 왕명과 선배, 동료 학자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여 다시 상경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잠시 지방에 나갔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1392년 드디어 이 성께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다. 그러자 상촌 선생은 처음에는 개성 두문동으로 들어 갔다가 다시 안동으로 내려와 남문 밖 상촌에 은거하였다.

조선 제3대 임금이 된 태종 이 방원은 상촌 선생에게도 헌장직을 제수하고 여러 번 관직에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응하지 않자 크게 노한 태종은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하며 만일 출사치 않으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제는 죽음으로써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아들 근을 데리고 한양으로 향하였다. 선생은 추령(경기도 광주에 있음)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멀리 삼각산을 바라보았다. 고개 너무 묻혀 있는 포은 정 몽주의 모습도 떠올랐다.

" 내가 죽을 곳은 여기로구나 !" 하시며 선생은 간절한 회포를 담은 진명시를 읊었다. 또 아들 근을 돌아보며, " 내가 죽거든 묘비를 세우지 말아라. 널리 알려지면 무인 무성이인 새 조정(조선)에서는 내 후손들에게가지 해가 미칠 것이다."
유언을 마친 선생은 품에 감추었던 독약을 꺼내어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니 때는 1413년 선생의 나이 63세이었다. 현재 선생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있고 선생의 유허비와 효자 정려각과 선생을 제향하는 추원재는 안동시 안기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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