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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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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일손(馹孫)이오 자는 계운(季雲)이며 호는 탁영(濯瓔)이고 본관은 김해로 절효 김극일(節孝 金克一)선생의 손자이고 남계 김맹(南溪 金孟)선생의 아들이다. 1464년(세조 10년)에 청도 운계리 (지금의 선원동)에서 태어났다. 출생당시 앞내에서 서기가 무지개 같이 뻗쳐 선생이 나신 후에도 서기가 오랫동안 있었다. 이와 같이 우주간기(宇宙間氣)로 태어난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여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인으로 교우로는 동문인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선생, 일두 정여창(鄭汝昌)선생과 친교가 있었다.

선생은 1486년(성종 17년)8월에 식년문과 갑과로 각각 장원급제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알성대과(謁聖大科)에 또한 장원급제 하였다. 선생은 성종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觀察使 李克墩)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그 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득돈의 원한을 샀고 원로권신들의 부정 부패를 직필하였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원년)에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후 신원(伸寃)되어 복직하고 도승지와 이조판서(吏曹判書) 추증받고 1830년(순조 30년)에 문민(文愍)의 시호를 내렸으며 선생의 출생지인 청도 서원동에 자계서원(紫溪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도승지 홍처량(都承旨 洪處亮)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선생은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남원(南原)의 사동서원(社洞書院), 함양(咸陽)의 청계서원(淸溪書院)등 에도 봉안하고 있다. 선생의 유물은 사화 때 없어지고 생시 애용하던 벼루와 유묵 몇장, 교지 등이 종가에 가보로 보존되어 있다.

선생은 고결한 학자였다고 안정 신영희선생의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서 말하기를 교리 김일손(校理 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다.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그의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글이 크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그가 나와 일을 의논하는 것과 사람의 시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청천백일과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폐와 연산은 어찌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여 시장에 버리는 형벌(刑罰)을 배풀었던가 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도주지, 도주문하, 해동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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