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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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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택

취용/백암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551년(명종 6년)
시대

상세설명

이름은 취용(就用), 호는 백암(栢巖) 관향은 의성이며, 증조부 임계 김 희달(臨溪 金希達)때부터 성주 대가면 내대(內垈)에서 옛 경주 북안 장동리 (章洞里, 현 영천군 임고면 사동)으로 옮겨와 참봉 김 순번(金順蕃)의 아들로 1551년(명종 6년 신해)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곧고 굳센 성격에 규율 있는 생활을 하며, 30살 때 모친상을 당했으나 효성이 남달라 여막살이 3년을 했었고, 42살 때 임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물밀듯이 우리의 강토를 짓밟았다. 이에 분격하여 마을 청장년들과 함께 그 해 5월 15일 밤 왜군 17명이 마을 뒤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추격해서 활과 창을 빼앗음을 비롯해서 백암산(栢巖山)속 협곡에서 잠복해 있다가 뛰어 들어 모조리 잡았다 . 이에 힘입은 마을 청년들은 서로 굳게 약속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어섰다. 총수 200여 명이 그해 6월 10일 권 응수장군의 진에 가서 권 장군과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복성에 참가하여 많은 공훈을 세우고 드디어 영천성이 복성되었다.

8월 16일에 독자암(獨子巖)에서 적을 무찌르고, 10월 10일에는 산곡(山谷)에 있는 토적을 쳐없애고, 1593년 2월 17일에는 창암(蒼巖)에서, 26일에는 울산 학성(鶴城)에서, 28일에는 도천(道川)에서 싸우고, 그 후 수십 차례 적을 잡아 베고 무찌르니 1594년(선조 27년 갑오) 8월 23일 훈련원 부정이 되어 언양현(彦陽)에서 적을 만나 무찌르고 1595년 5월에 훈련원 정이 되었다. 그해와 그 다음해 2년 간 걸쳐 영천, 경주, 울산 사이를 드나들며 수십차례 적을 수없이 무찔렀다.

그러던 중 1597년(선조 30년 정유)에 적이 대거 다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다. 그 해 9월에는 권 응수 장군과 체찰사 이 용순(李用淳), 병마사 김 응서(金應瑞)등과 함께 달성에서 싸웠고, 그 해 12월 20일 울산 서생포(西生浦)에서 권 응수장군의 재종제인 권 응심(權應心)과 함께 진종일 적고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져 다음날 장열하게 순국하고 말았다.

애석하고 원통하도다, 임란이래 30여 차례 적과 싸워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고 공훈을 세웠던 김 응택 의장은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모조리 쓸어내지 못한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음해인 1598년 4월 이씨 부인은 17세의 아들 경룡(景龍)과 서생포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를 못하고, 그 다음 해인 1599년 봄 동리 사람들이 함께 초혼해서 장례를 임고면 작점(鵲店)에 지냈다.

나라에서는 1856년(철종 7년 병진)에 자현대부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절(文節)로 내려졌고, 그 후 선비들이 모여 임고면 사동에 있는 백암사(栢巖祠)에 봉향하고, 사동에 유허비와 이려표비(里閭表碑) 등이 세워지고, 1979년 봄에 충의공 권 응수 장군과 권 응심 의장을 향사 지내던 귀천서원에 함께 추향토록 되어 김 응택의장의 충혼을 잠드시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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