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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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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렬

학부
활동시기
근대이후
본관
출생시기
1891년(고종 28년)
시대

상세설명

"면장 잡아라! 이러다간 백성이 살아 남지 못하겠다. 미친 면장 잡아라"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도 못할 엄청난 계획아래 시작한 부역(賦役), 허기진 배와 노동 일에 지치고 지친 백성들의 한결같은 불평과 원성(怨聲)이 온 면내에 메아리쳤다. 때는 기미년 3.1운동 직후 고로면 일대에서 일어난 아우성이다. 고로면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은데 곳곳에 있는 절벽 아래로 마치 구곡양장(九曲羊腸)같이 굽이굽이 흐르는 금천을 따라 토끼 길과 같은 오솔길이 있을 뿐이니 교통의 불편이란 이루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 불편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깨달은 선각자(先覺者)들이 이 곳에 큰길을 뚫기로 결정하여 대역사(大役事)를 시작한 것이다. 요사이 같으면 중장비(重裝備)를 동원하여 쉽게 이룰 수 있겠으나 70여 년 전의 일이라 모든 작업은 인력에 의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역사적인 신작로 개설의 대역사는 당시 고로면장이었던 김응렬씨(金應烈)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관향이 경주 김씨로서 이름을 응렬, 자는 학부(學夫)라고 하였다. 1891년(고종28년)에 출생하여 1952년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온량하고, 외유내강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후덕한지라 모든 일에 관인 하였으며 효행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현의 글을 배워서 나중에 고로면장의 중책(重責)을 맡아서 위와 같은 혁혁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 당시 세태는 삼일운동 직후 세상이 술렁거리는 때라 면민을 설득하여 어려운 공사(工事)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수동에서 학성동에 이르는 10여 리를 산을 깎고, 암벽을 깨뜨리고 물길을 돌리는 일은 인력으로 해내기 어려운 중노역(重勞役)이니, 면민들의 고통이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기에 면장에 대한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 면장의 선견지명과 향토개척의 애향심은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뿐이니 애타는 심정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성과 집념으로 면민을 설득하여 앞장서서 일을 계속한 결과 큰 길이 차츰차츰 이루어져 가니 그렇게도 아우성치던 면민의 원성은 점점 줄어져 가고 비로소 김면장의 선견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일은 난공사(難工事)도 쉬워지고 날로 빨라져서 훤히 뚫린 큰길을 보고는 모두 다 기뻐하며 김면장을 칭찬하게 되었다. 세상은 변하여 지난날 불평을 하며 닦은 그 길로 자동차가 다니고 버스가 내왕하여 생활수단이 편리해지니 이제 다시금 그의 선경지명과 공적을 기리게 되었다. 보석은 숨겨 두어도 빛이 나고 사향은 싸두어도 향기가 나는 법, 그가 가신 지 22년째 되는 1974년 11월에 금천 맑은 물이 굽이도는 산모퉁이에 송덕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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