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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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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명

취죽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1573년(선조 6년) 용성면에서 출생하였다. 호를 취죽당이라고 한다. 15세에 밀양 영남루에서 감사 유영순이 시관이 되어 치른 초시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영탁한 수재이었다. 20세에 임진란을 맞아 가내 장정을 데리고 곽재우를 따라 정진에서 싸워 노획함이 많았다. 곽재우 의병대장이 항상 그의 그릇됨을 소중히 여겼다. 정유재란에 그의 부 김우련 또한 곽재우 방어사가 수성하는 창녕 화왕성에 입성하니 곽재우 방어사가 부모를 형제를 보듯이 반겼다고 한다.

난후 사마에 뽑히어 생원에 올랐다. 일찌기 아버지의 명에 따라 성주의 한강 정구의 학사 백매헌에서 학업을 닦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또한 박식하였고 성실 경건하였으며 항상 행동을 단정히 하고 벼슬에 뜻이 없었으므로 향리에서 연하천석 사이를 소요하고 또한 독서에 힘썼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전후 6년을 여막에서 묘를 지켰다. 병자란에 향인 백현룡 및 이광후, 이창후 형제와 의거하는 도중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여 돌아와서 산중에 은거하고 거처에 대를 많이 심어 그의 꼿꼿한 우국충정을 자위하고 스스로 호를 취죽이라 일컬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자인 복현을 위하여 방희국을 우두머리로 하여 최두립, 이시겸, 이창후 등 상하 300여인이 대거 상경하여 상소장을 내어 자인이 경주부에 속하여 현민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시정하려 하였고 인조 15년에 실현을 보았다. 나라가 위태할 때는 의병으로 일어났고 향리의 백성이 시달리면 박차서 이를 바로잡기에 앞장섰다. 1700년(숙종 26년) 자인현민이 이공후, 이창후 형제와 함께 상덕사에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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