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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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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활동시기
근대이후
출생지
고아면 원호동

상세설명

본명은 영득(榮得)이며, 본관은 선산(善山), 현묵(賢默)의 아들로 1907년9월22일 고아면 원호동에서 출생하였다. 유영(幽影)은 영화계의 예명(藝名)이다. 남달리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영화계에 투신한 이래, 온갖 정열을 쏟다가 요절한 선생을 사람들은 "아가운 사람"이라 했다. 불과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마지막 감독한 작품의 시사회(試寫會)도 보지 못하고 타계하신 선생의 한국영화 예술에 바친 공적은 실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견학하였고,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장편소설(長篇小說) "꽃다운 청춘"을 발표하여 책으로 발행하였으며 숙부 김승묵(叔父 金昇默)씨가 주간하는 "여명(黎明)"을 제호(題號)를 바꾸어 "시대공론(時代公論)"으로 간행하고, 영화예술협회를 조직하여 처녀작품 "유랑(流浪)"을 촬영하였다.

그 뒤, 192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영화 감독「다사까 가이후리」등과 사귀어 한층 영화 예술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였으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혼가"(昏街) "화륜"(火輪)등을 제작하고 1934년 극단 신건설(劇團新建設) 사건으로 전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5년 전주 형무소를 출감하여 대구에서 창립된 「코리아」영화제작소 예술고문으로 "황혼"(黃昏)을 촬영하고 37년엔 월간(月刊) "피신(避身)"을 창간, 38년엔 영화부 제1회 작품 "전발성(全發聲)""애련송(愛戀頌)"을 제작, 39년엔 조선 영화주식회사 작품 "수선화(水仙花)"를 병중에서 감독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다가 같은 해,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1940년 7월에 「고 김유영 감독 추도 수선화 유료 시사회」를 개최하였고, 1973년12월29일엔 한국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경상북도지부 주관과 각기관 후원으로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추모회를 가졌다.

참고문헌 : 한국예술 문화사 1973. 8. 14 영남일보 "그인물 그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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