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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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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초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고려말 용인에서 태어났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론 부항면 유촌리에서 살다가 성주에서 서거하고 묘는 유촌리에 있다. 건장한 체구에 재질과 용력(勇力)이 뛰어났다.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에 있으며서 무예(武藝)에 있어서는 활쏘기와 말타기로는 어떤 무인보다 뛰어났다. 공민왕 2년(1353년), 공민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사냥 나가서 무예를 겨루는데 날아가는 새를 백발 백중으로 맞추고, 백 발자죽 밖의 나뭇잎을 맞추어 그 상으로 말 한 필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말의 충신 백문보(白文寶)가 이 광경을 지켜고보 경탄하여 쓴 시가 다음과 같다.
駕前虎賁皆少年 張弓發矢百步穿
個中兩雄金與李 精勇拔萃何翩翩
임금 어가(御駕) 앞에 선 범같은 용사들은 모두 소년이로다.
활당겨 쏘아 백보앞 겨냥을 맞추었네.
그 가운데 두 영웅 있으니 김과 이로다.
이들 무용은 뭇 가운데서 뛰어나니 감탄할 일이로다.

이 때 왜구가 양광도(楊廣道:경기도)에 침범하여 밀직(密直)벼슬에 있던 공이 평정하여 공과 더불어 정도전 조준 등 3명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 이태조가 나라를 세우매 이에 공을 세워 순충분의좌명 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이 되고, 가의대부 호남도병마 도절제사(湖南道兵馬都節制使)와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관찰사를 지났다. 77세에 돌아가니 태종은 제문을 지어 보내고 3일간 조정의 조회(朝會)를 폐했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했다. 후손이 그를 추앙하여 부항면 유촌리 용현(龍峴) 묘 밑에 영모재(永慕齋)를 짓고 신도비를 세웠다. 향민들은 그의 묘를 김장군 묘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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