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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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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비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고려말 14세기 중엽(1361년)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서 크게 쳐들어와서 그 기세 매우 사나우므로 임금(공민왕)이 복주(현 안동)와 이곳 옥산면 성골 등지로 피난할 즈음 그 무리 일부가 의성 일원에도 많이 날뛰어 백성들의 재산을 앗아 가거나 살상까지 일삼아 인심이 자못 불안해지고 생활 안정을 찾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 때 의성 현주로 책봉되어 온 이곳 출신 김용비가 홍건의 한 도적떼를 물리치고 민심을 수습, 편히 살 수 있게 하니 그 공이 컸던 바다. 이렇게 홍건적 난리를 평정한 은상으로 그는 이등공신이 되고 고려 금자광록 대부(金紫光록大夫) 태자 첨사 의성군이란 벼슬에도 이르게 되었다. 그의 시조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네째 아들이고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수봉된 의성 김씨 석으로 그 9세 손이 된다.

공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인 강씨와의 슬하에는 4남 4녀를 두었다. 그 시조 석이 의겅현에 살아 관록을 대식(官록代食), 자손들이 대대로 봉군의 벼슬을 새습하여 공에 이르러서는 상기한 바와 같은 군공이 민중에 미치매, 읍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건립 제향, 그 후손 모재안국이 경상도를 안찰시 그 정사에 힘쓴바 있고 아울러 원세손 문충공 성일도 종족과 의논하여 그의 묘우를 새로 세워 '진민사'란 이름을 붙였다.

그 뒤 1656년(효종 7년)에 이곳에 도임한 안응창이 현재 사곡면 토현동 오토산에 있는 공의 묘소를 돌보고 매년 향사케 배려했었다. 그의 유택이 있는 곳은 당시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을이 정한 명산으로 알려져 지금도 전국 저명 지사들이 가끔 돌보고 간다 한다. 현재 읍내 후죽동 중심가 노변에도 공을 기리는 비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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