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김용규

활동시기
근대이후
출생지
남산면 반곡동

상세설명

우암 김용규는 본은 김해이고 삼족당 대유공의 13세손으로서 1894년 1월 24일 남산면 반곡동에서 응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대구 계성학교(지금의 계성고등학교)를 나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신앙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1919년 3·1운동 때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교직에 있으면서 전도와 국민회 결사의 조직 임무를 띠고 각지를 순회 중 그의 아버지와 동지 박승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피검되었고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동지이던 이종식과 다시 피검된 바 있다.

그 후 기독교 경지사에 입사하여 흥사단과 제휴하여 사원을 모집 중 동지 정인과가 피검되므로 실패로 끝나자 한국의 독립은 장기적으로 국제추세에 좌우될 것임을 판단하여 1925년 목사가 되어 경산교회, 대구 서문교회를 교목하면서 미국 선교사 "버그만"을 통하여 "헐"국무장관에게 일본의 학정을 폭로, 한국의 독립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1938년 호조 선교회장 "부오란"으로 하여금 일본의 학정과 교회압박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고자 호주의 시찰단을 한국에 파견케 하였고 동회 선교사 서덕기와 그 부친과 회동하여 학정의 실정을 세계 종교계에 알리기로 합의하여 서덕기 부친을 영국에 건너게 하였다.

미국인 범태평양회 창설자가 내한하여 진주에 있었던 "부오란"선교사 자택에 유숙하게 되자 그와 밀담하여 일본의 학정, 즉 산업착취, 기독교 박멸, 민족 말살, 식민지 교육, 강제 이민, 농업 수탈의 6개 조항을 설명하고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던 바 "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민족이다"라고 개탄하면서 이 실정을 가맹 22개국에 퍼뜨려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일본을 규탄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 해 6월 김용규 목사가 시무중인 진주 교회에 일본 관헌이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단호히 이를 거부하였다. 일제는 김용규 목사를 위시해서 많은 교인을 연행하여 고문을 가하므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각자가 사사로이 신앙을 보전할 것이라고 교회를 폐쇄하고 경산읍에서 은신하면서 동지들과 밀회를 계속하였다.

1939년 대구 헌병대에 피검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굴하지 않고 끝내는 병보석, 출감과 함께 금족령을 받고서 경산읍 중방동 자택에 은거하면서 초가 단간을 우암사라 부르고 시국을 개탄 울분을 누르고 은인하였다. 백의민족의 불굴의 긍지로서 항시 한복을 착의하였고, 접하는 상대가 일어를 사용하면 묵묵히 벙어리가 되고 우리말을 사용하는 등 민족의식을 견지하여 주위 사회를 일깨웠다. 조국이 광복되자 곧 경산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한국민족대표자대회 경산대표 및 중앙상임위원에 추대되었고 경산군수(1946∼1974), 경상북도 인사처장을 역임하였다.

건국의 기틀이 잡히자 본연의 성직으로 돌아가서 경북노회장, 대구 고등성경학교장, 전국기독교 구국회장 및 대구남산교회를 목회하였고 만년에는 대구시 산격동에서 동우성로원을 운영 중 1968년 5월 20일 작고하였다. 대구시 신암동 선열 묘지에 안장되었고, 1978년 7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목사 김용규 묘비 경산군 추진위원회에 의하여 묘비가 건립되었고 비문은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의 한 분인 연당 이갑성 공이 찬하였다. 또 시인 박목월의 묘비시가 함께 새겨졌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