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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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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

활동시기
고려시대

상세설명

김요는 함창에 세워진 고령 가야왕(古寧伽倻王)의 후손으로 고려 충선왕때 함창에서 대 문장가이고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에 추봉(追封)된 김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320년(충숙왕 7년)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좌윤(左尹)을 역임하고 중국의 학사방(學士坊)에 유학하였다. 중국 유학중 거기의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문명(文名)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니 부득이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이때 김요는 왕을 모시고 남으로 가게 되었다.

함창까지 내려 왔을 때 함창의 국사봉(國師峰)에 주둔하고 흙과 돌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거기서 수비하면서 서울인 개경을 다시 찾고져 계책을 꾸몄다. 그 해 12월 안동에서 전세를 만회하여 홍건적을 몰아내었다. 그 공으로 중대광찬성사(重大匡贊成事)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그의 충의와 절개가 남달랐다. 늙으막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창으로 내려왔다. 서강촌(西江村-현 공검면 예주리(曳舟里)에 청향정(淸香亭)을 짓고 생질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작은 배를 만들었다. 강건너 가정(稼亭)에 사는 매형 자정 이 곡과 만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강촌(江村)선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자연을 즐기며 지내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또 마을 이름은 예주촌(曳舟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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