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자는 효중(孝中), 호는 망와(忘窩),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현감 대현(大賢)의 아들로서 1577년(선조10) 영천군(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3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1612년(광해군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를 거쳐서 전적(典籍)에 승진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피해 족적(足蹟)을 감추고 시골에 은퇴해 있다가 1923년 인조반정이후 다시 벼슬에 올랐다.
세자책봉(世子冊封)으로 중국에 사신(蛇身)으로 갈 때 일행이 수로(水路)가 험학함을 근심하였으나 영조공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고, 배로 향해도중 풍랑을 만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통곡하였으나 종용하며 여상(如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후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을 지냈고 이어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6차나 어사(御使)로 제수되어 출사(出仕)했다.
그리고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부제학(부제학), 우승지(우승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후 1624년(인조20) 이조참판(吏曹參判)을역임한 후 벼슬에서 퇴임했다. 병자호란 이후의 어지러운 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공이 크며 평소 학덕과 풍절(風節)이 추중(推重)하였다. 문집으로는 망와집이 있고 영주의 구강서원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