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경북을 빛낸 인물

no image

김영조

효중/망와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자는 효중, 호는 망와, 본관은 풍산, 1577년(선조 10년)에 산음 현감 김대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담한 전쟁의 피해를 몸소 체험하여야 했으며 청년기에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연이은 전화와 당쟁 속에서 오직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분투하였다. 1637년(인조 15년) 조정에서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않고 오히려 청에 대한 명분을 지킬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대사헌으로서 61살의 선생은 왕에게 청나라에 대한 명분보다 조선의 피를 아껴야 한다는 내용을 장계하였다. 이같이 왕의 권위를 겁내지 않는 민족주체성의 집념은 그 이전이나 그 후에도 우리의 역사에서 그 맥을 찾지 못할 것이며 오늘날에 와서 선생의 장계만이 바른 길을 바라보는 풍토를 형성하고 있을 따름이다.

1633년(인조 11년) 선생이 57세때 명나라 황세자 책봉 주청사 및 동지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안개에 쌓여 이상한 섬에 들렸다가 기이한 지팡이 하나를 얻었다. 선생은 중국에서 신기한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중국 황실의 요펑으로 중국황제에게 선사하게 되었는데 중국의 박물자들은 이 지팡이가 청여장이라 생전에 귀한 사람이 받은 물건을 어기면 재앙이 있을 것이라 해서 이 지팡이를 다시 돌려 받았다. 이 지팡이는 모양도 신비롭지만 때리면 쇠소리가 나는데 1950년 문교부에서 문화재 감정의뢰가 있어 서울에 보관 중 6ㆍ25동란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1643(인조 21년) 이조참판에서 면직된 후 물야면 오록리에 마련된 서재 망와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48년(인조 26년) 72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후인들은 구강서원에서 향사하였다. 저서는 남정일록, 망와집.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영남인물고, 국조인물고, 망와집, 조선일보(1969.6.26인물로본한국학)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