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김여권(金汝權)은 본관이 의성(義城)이고 호는 관란재(觀瀾齋)인데 1557년에 구성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심이 두터웠고 글재주가 빼어나 친족인 학자 동강 김우옹(同岡金宇 )에게 글을 배우고 성리학에 심취하여 학문이 깊고 문학 또한 뛰어나 만년에는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과 교우가 깊었다. 공이 12살에 지례현감 상공(尙公)에게 글을 배울 때 하루는 상공이 구성루(龜城樓)에 올라 "때는 가을이라 추경이 가상(可賞)이라"는 韻을 내어 시를 짓게 하니 12세 소년은 즉석에서,
[성에 가득한 단풍 가을을 더욱 빛내니
거두어 모두 해낭(奚囊:풍류객이 시초(詩草)를 넣고 다니는 주머니)에 담을 수 없도다
풍성한 가을에 집집마다 술이 넘치니
모든 사람이 원컨대 우리 원님에게 바치리라]
고 하니 현감이 감탄하여 상을 주었다.
滿城紅葉景多秋 難以奚囊盡入收
剩將此曰家家酒 願使人人獻我候
공은 항상 옛 성현들의 옳은 말씀을 기록하여 다니면서 읽고 외웠으며, 죽을 때까지 충, 효, 의를 좌우명으로 삼고 나라의 제삿날은 적어서 벽에 붙여 두고 그날에는 소식(素食)으로 지내고, 국상을 당하면 제단을 설치하여 분향 망곡했으며, 친상을 당해서는 3년 여묘는 물론, 상복을 벗지 않고 마음으로 끼니를 이었고 모상 때에도 그와 같이 했다. 친구간에도 상사를 당하면 힘을 다해 어려움을 도왔으며 소식으로 슬픔을 같이 나누었다.
불과 30세에 지례향교 교임(校任)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아, 왜병의 분탕질로 향교에 불이 붙어 대성전이 불길에 싸임을 보고 송천상(宋天祥)과 더불어 불길속에 뛰어들어 오성위패(五聖位牌)와 동방 제현(東方諸賢)의 위판을 업어내어 향교 뒤 정결한 곳에 묻어 모셨다가 뒤에 등곡(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으로 옮겨 모셨다. 등곡에서 8년간을 모시면서 정성을 다하여 삭망(朔望)에는 분향하고 춘추제향을 게을리하지 않으리 순찰사 한준겸(巡察使韓浚謙)이 난중에 호성(護聖)한 공을 찬양한 시를 써서 남겼다. 공의 문집으로 구호세전(龜湖世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