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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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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륜

활동시기
조선시대

상세설명

1565년(명종 20년)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동네 지장서제에서 한문수학을 하고 틈만 있으면 병서 읽기를 좋아하였다. 장군의 나이가 27세 되던 해 1592(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계사년 1593년 8월에 울진에서는 고읍성 싸움과 덕천리 분투골 싸움이 가장 치열하였다.

계사년 1593년 8월에 왜군이 울산에 상륙한 북상군 수천명이 고읍성을 처들어 오고 강릉에 상륙한 왜적이 남하하여 이 고장에 침입하므로 장군은 고목리 가치산 소나무 가지마다 야등을 밝히고 동남향으로 푸른막을 치는등 이병으로 위장케하고 장유대서 망을 보며 덕천앞 호반에 작은 배를 띄어 놓고 기묘한 전법을 썼다. 장군은 남하하던 왜군을 덕천리 벌이개에 몰아 넣고 번개같은 "쇠도리개"로 적을 공격하니 아군들도 용기를 내어 접전 3일만에 적의 사체는 산과 같이 쌓여 졌다.

한편 고읍성에서 읍성을 지키던 주호 장군을 물리친 왜병은 덕천으로 진격함에 장군은 들어 오는 적과 싸우게 되나 복배수적이라 아군의 원병은 줄어들고 병기가 열세하여 장군은 적군 의 유탄에 맞아 분투골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쌍방의 병사의 사체가 산적되었으니 임란사에 있어 고읍성 싸움과 분투골 싸움이 영동 지방의 최대의 격전지라 하겠다.

오늘날 김언륜 장군의 불러지는 이름으로는 "쇠도리개" 장군이라 하고 출생지인 뒷산을 가치산. 놀 던곳 장유대와 격전지를 벌인 벌이개. 전사한 분투골 등 지명이 있고 유적으로는 문헌에 나타난 바로는 조선조 경종때 진사 백시승의 유고에 김언륜 장군은 죽이고 사로잡아 전공은 컸으나 상은 내리지 않았다 라고 기록이 남아 있다. 분투골 전투에서 김언륜 장군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장열하게 돌아가시니 이곳 역전 분투했던 이 골짜기를 분투골이라 불러지고 병사가 수없이 죽어 묻혔다하여 동명을 만분이라 하다가 마분동이라 불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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