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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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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려

/석계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김해인(金海人)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의 6세 손으로 김천시 대덕면 대리(臺里)에서 태어났다. 호를 석계(石溪)라 했는데 효행이 뛰어났으며 지용(智勇) 겸전의 명관으로 특히 병법(兵法)에 뛰어났다 한다. 임진왜란 당시 어모장군(禦侮將軍) 제주목사(濟州牧使) 병마수군 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있었는데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나라 은혜에 보답할 때가 왔다'하고 아버지 진사(進士) 응봉(應鳳)과 아들 우부승지(右副承旨) 여박(汝珀)과 같이 기병창의하여 읍민 수백명과 어군(禦軍) 3백명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웠다. 의분이 충천하고 일당백의 용맹으로 싸웠으나 장비나 군사수에서 열세라 피가 바다를 이루도록 분전했지만 끝내 성은 깨지고 공의 3부자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항복을 강요하는 적을 꾸짖으며,
"설혹 머리를 베일지언정 장수가 적에게 항복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적도 공의 뜻을 꺾지 못할 줄 알자 목 베니, 3부자가 한 날에 충의앞에 신명을 바친 것이다.

3부자의 일월같은 충의는 세상 사람을 놀라게 했다. 집안에 선 초혼(招魂)하여 사림산(詞林山)에 단(壇)을 모았으며 나라에서는 김승려 공에게 충열(충열)이라 시호를 내렸다. 1978년에 월성(月城) 손석원(孫錫遠) 찬(撰)의 충열공 김승려 장군 3대 묘단(忠烈公金承礪將軍三代墓壇)이 섰고 공자 탄생 2470년에는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행실 중간 연원 유림 향약본소(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淵源儒林鄕約本所)에서 공의 3부자 충의를 포상하는 포창 완의( 彰完議)를 결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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