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설명
생애를 효로 출발하여 충으로 끝마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김시창이다. 공은 해풍인(海豊人)으로 호를 남정(嵐亭)이라 했고 1472년(성종 3년) 대항면 대룡동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지효하여 어머니를 모심이 지극하였고 그의 학문은 사림의 추앙을 받을 만큼 깊어 조광조의 추천으로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김종직·조위 등이 이끄는 영남 신진 사류(嶺南 新進 社類)의 참모격이 되기도 하였다 한다. 그 때문에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죽자 아들이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기도 했고 공은 두문불출한 적도 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거려(居廬 : 묘옆에 막을 매고 묘소를 지키는 예법) 3년에는 법도가 남의 본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공은 효성만 지극한 것이 아니었다. 20세 때 성종이 돌아가시자 그것을 필두로 중종·인종의 세 임금이 돌아가실 때마다 신하로서 제례를 극진히 하여 세상에 그 지극한 충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인종의 승하시는 공의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복례에 어긋남이 없었다니 공이야말로 효를 충으로 승화 시킨 분이라 할 만하다. 공의 서거후 조정에서 공의 갸륵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호를 효절, 정려를 내렸으며 우암 송시열은 묘비표에서 공의 충효는 만인의 본이 된다고 찬양했다. 묘소는 봉산면 고도암리에 있고 공은 후에 경렴서원(景濂書院)과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