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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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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金叔滋)

자배/강호산인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389년(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
시대

상세설명

본관은 일선. 순충공 선궁의 후손. 이름은 숙자(叔滋),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1389년(고려 공양왕 원년)에 선산 연봉리에서 출생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나이 12세에 야은 길재선생(冶隱 吉再先生), 별동 윤상(別洞 尹祥) 선생에게 수학하여 몸 가짐의 도리와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15세에 향학(鄕學)에서 공부하여 친구와 더불어 함께 노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종일토록 책을 벗삼아 모든 서적을 일일이 탐독하며 진리를 탐구하여 실천에 옮기며 오직 배움이 부족함을 걱정하였다. 1414년(세종 14년) 진사에 합격하여 1419년에 문과에 오른 후 사관(士官)에 수선(首選)되어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는데 극진하였으며,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략을 다하였다. 1431신해(辛亥)에 양친 상을 거듭 당하니 한방울의 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빈소(殯所)에서 죽을 마시며 장사 후는 묘 옆에 떼집을 지어 3년을 지내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1439년(세종 21년) 기미년(己未年)에 세종대황께서 정사에 밝고 도덕과 행실이 올바른 신하를 선발하여 사유록(師儒錄)을 비치하니 선생이 가장 으뜸으로 천거 되었다. 그 후 벼슬에 나가 김해·고려·개령현감·선산·성주교수·성균사예(成均司藝)을 역임하면서 여러 고을을 다스림에 청백(淸白) 하였으며 토지와 백성을 사랑함도 학문을 배우는 길이라고 하며 오로지 백성을 위하여 좋지 못한 풍속을 혁신하고 미풍양속에 힘써 매년 봄, 여름 마을을 돌아보고 종자가 없는 사람에게는 종자를 빌려 주고, 양식이 없는 사람은 환곡으로 도와 주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칭찬하고 태만한 자는 꾸짖고 흉년을 당하면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이 없도록 고루 구휼하고 노인과 병들고 불우한 백성을 일일이 도와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하여 혼례를 치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혼수를 장만하여 혼례를 치르도록 주선해 주시니 풍속이 점저 순화되어 도적이 자취를 감추고 없으니 인근 고을까지 그 혜택을 입어 고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사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1456년(세조(世祖) 원년) 선산에서 밀양(密陽)으로 이거(移居)하여 이듬해 1456년 3월 2일에 돌아 가셨다. 헌종(憲宗) 10년(1844)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 하였으며, 선산 낙봉서원(洛峰書院), 거창 일원정(一源亭)에 향사하고 있으며 경남 거창군 나망면 한산리에 부조묘(不 廟)와 제청(祭廳) 추원당이 있다.

참고문헌 : 유교연원록, 조선유학사, 국조인물고, 강호집, 일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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