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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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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중

군승/낙안당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484년(성종 15년)
시대

상세설명

선생의 휘는 세중(世仲)이오 자는 군승(君承)이며 호는 낙안당(樂安堂)이고 본관은 김해로 삼중대광 김녕균 김목경(三重大匡 金寧君 金牧卿)선생의 8세손이며 돈령부사 안정공 김효득(敦寧府事 安靖公 金孝得)선생의 증손이고 승지 김양(承旨 金 )선생의 아들로 1484년(성종 15년)에 영산 교촌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명철하여 어릴 때부터 근면하고 나이 7세에 응대하고 진퇴함이 의젓했고 절의를 중히 여겼으며 8세 때 이미 소학을 정통하였으며 학사(學士)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명암 이중(明巖 李中),임천 배학(林泉 裵鶴)두 선생과 더불어 보림(寶林)에 정각(亭閣)을 세워 그 이름을 청암(청암),명암(明巖)이라 하고 도의로서 교우하며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다 동천 김식(東泉 金湜)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되에 명암 이중(明巖 李中)선생과 같이 망헌 이주(忘軒 李胄)선생의 문하에서 철리를 탐구하였는데 그때 망헌 이주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일두 정여창(一 鄭汝昌) 등 여러 선생들이 선생의 풍도(風度)를 극구 칭찬 하였다하며 무오사화에 망헌(忘軒)과 여러 선생이 피화 되자 그 애통함에 식음을 전폐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현자(現者)를 사모하였다 한다. 1535년(중종 30년)에 사림의 천거로 호군(護軍)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선생의 선대는 경기도 장단 사동에 살다가 창녕군 영산 교촌리(지금의 계성면 광계리)에 이거 하였다 한다.1509년(중종 4년)에 운문사를 역방할 때 청도의 광월리(지금의 매전면 하평동 광월리)에 들려 살피니 지세(지세)가 아름답고 심오하며 민속이 순후(醇厚)함을 보고 후손들에게 복거(복거: 살 곳을 가려서 정함)할 것을 타이르고 은행나무를 손수 심었는데 지금도 울울창창하게 자라고 있다. 1553년(명종 8년)에 향년 70에 졸 하였다.

참고문헌 : 낙안당문집, 명암문집, 국사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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